히브리서 11장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을 오해했었다」

by yukkomi



성경은 인간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기록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부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불순종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사와 선지자를 보내시며 끝까지 자기 백성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당할 때 잠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불순종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순종으로 유지된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로 유지된 역사였다.
순종과 불순종이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들의 손을 놓지 않으신 역사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열된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처음부터 믿음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삶을 반복했다. 야곱 역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지만 라반 밑에서 다시 속이고 속이는 삶을 살았다. 기드온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계속 증거를 구했고, 삼손 또한 자신의 힘을 믿고 마음대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주권적으로 이끄셔서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내 결심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붙들리는 것이다.
수많은 인생의 사건과 사고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보이지 않는 미래의 약속에 대해서도 믿는 존재로 자라나는 것이다.
믿음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며, 그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시다.

물론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않고 반응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키셨고, 완전한 구원이신 예수가 올 때까지 성령을 통해 그들을 이끌어 가셨다.

그런데 많은 설교들 속에서 이 ‘믿음의 장’은 종종 율법적으로 선포되었던 것 같다.
많은 설교에서 믿음의 조상들처럼 큰 믿음을 가져야 약속이 이루어지고,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는 인간이 끝까지 참고 견뎌야 함을 강조했다.
약속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믿지 못하고 인내하지 않는 나의 문제라는 식으로 인과응보적인 설교를 했다.
그러한 설교를 들을 때마다 믿음이 적은 나는 나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고, 믿음 없음을 솔직히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인내하다 너무 지쳐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나를 스스로 자책하며 미워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생각한 약속은 '문제 해결이 된 상태'라 여겼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믿음이 없는 자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떻게 인내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열심히 기도와 열심히 공을 쌓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 충만이라는 이름으로 신비주의를 좇았던 것 같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현실의 박해와 고난 앞에서 흔들리고 믿음과 인내를 지켜 내지 못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을 꾸짖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이미 받아들인 예수가 누구인지를 차분히 다시 설명한다.

히브리서 1장부터 10장까지는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신앙의 기둥들—천사, 모세, 아브라함, 율법, 성막과 제사—을 하나하나 예수님과 비교하며 예수님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크고 완전하신 분임을 증언한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율법을 받은 모세보다 크신 집의 주인이며, 아브라함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자 반복되는 제사를 끝내고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참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이야말로 유대교가 그토록 중요시한 모든 것들의 실체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하고 완전한 길이심을 차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의 장 11장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을 왜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셨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한 사람들이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내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넘어질 때마다 일으키셨고 성령을 통해 그들을 이끌어 가셨다. 하나님의 용납과 기다리심을 통해 자신의 아내를 이방인의 왕에게 내주었던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릴 만큼 믿음이 성장했고, 약속을 믿지 못하고 비웃었던 사라를 통해 약속을 성취하셨다.
속고 속이던 야곱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만드셨고, 버림받아 상처로 살던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하는 용서의 사람으로 만드셨다. 자기가 이스라엘을 돕겠다고 생각하다 철저히 무너진 모세를 찾아오셔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삼으셨고, 죄악으로 가득한 여리고 성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살던 라합을 통해 다윗의 계보를 이으셨다.
사사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자기 힘을 믿고 함부로 살던 삼손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기드온을 순종의 용사로 만드셨다.
집안에서 우습게 여겨지고 양치기에 불과했던 다윗을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셨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왕으로 키워 나가셨다.

이렇듯 히브리서 기자는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드린 순종의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며 현재 히브리 사람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위로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말한다.
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인내로 약속을 향해 달려갔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너희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도 받지 못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렇다면 약속은 무엇일까?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결과는 모두 달랐다.
아벨은 믿음의 제사를 드렸지만 결국 죽었다. 또 다른 사람 에녹은 죽음을 보지 못했다.
노아는 믿음으로 가족과 인류를 구원했다. 하지만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 속에 죽어 갔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문제해결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약속은 무엇일까? 어떠한 약속을 바라보았기에 그들은 고난을 견딜 수 있었을까?
그들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바라보게 된 약속은 바로 하나님과의 하나됨이고, 바로 본향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목숨의 인생이 끝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이 약속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현실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나됨이란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이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 되신 관계이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평안과 확신과 자유를 누리는 상태이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막연히 하나됨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하나됨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메시아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하나됨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은 미약한 믿음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됨의 열쇠인 예수님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약속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대비시켰을 것 같다.
그리고 12장에서는 우리 믿음을 키우는 주체이며 우리 믿음을 성장시키시고 완성시키실 예수를 계속 기억하라고 말한다. 소망을 나에게 두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생명의 예수님께 두라고 말한다. 그것이 받을 약속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을 말한다.
예수로 인해 이제는 열린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히브리서 11장은 “선배들처럼 순종하라”라고 요구하는 장이 아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이니 하나님의 품에 머물며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의 터널을 지나라고 격려하는 장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을 겪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고난의 상황을 겪고 있지만, 고난의 의미를 알고 약속을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권면은 더 깊고 생명력이 있었다.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더 믿음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설명해 주는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 있다.


이전의 나의 신앙생활도 구약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들림 받아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애썼지만 계속 넘어졌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영접의 순간까지 계속 이끌어 오셨다.
그때의 나는 하나님이 주시려는 ‘약속’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 약속을 누리지도 못했다. 내 안에는 안식도 자유도 자연스러움도 없었다. 마음은 늘 긴장되어 있었고 쉼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약속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고 그 하나됨을 실제로 조금이나마 누리고 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처럼 느껴지지만, 이 모든 길이 결국 약속이 이루어지는 길임을 나는 분명히 믿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있다. 항상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
이제는 성소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를 깊이 만나는 지성소 안으로 자유롭게 드나든다.
지금도 불안할 때는 정말 많다. 하지만 불안이 오히려 동력이 되어 나는 다시 예수님의 안식 속으로 들어간다.
외로움이 밀려올 때도 그 외로움이 동력이 되어 아버지의 손을 더 꼭 붙잡는다.
불안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불안 때문에 더 깊은 안식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아버지를 믿어 드리려고 애쓰지 않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신뢰한다.
아버지가 신뢰할 만한 분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경험과 공동체의 다른 지체들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너무도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내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의 믿음이 자라나 영원의 시간 속에서 나를 온전하게 하실 것을 믿기에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


나는 오랫동안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영웅을 세우는 장으로 오해해 왔다. 그러나 이 장은 믿음이 부족해 흔들리는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의 지성소로 데려가기 위한 히브리서 기자의 간절한 격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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