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경주
히브리서를 계속 묵상하면서,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흔들림이 예수를 영접했음에도 여전히 확신도 없고 평안도 없었던 나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된 히브리서는, 믿음이 약해 흔들리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글이 아니라,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확신으로 이끌기 위한 사랑의 편지처럼 다가왔다.
[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1~2)
그렇다면 우리의 경주는 무엇일까.
믿음의 경주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달리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 됨이라는 결승선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 곧 성령의 모든 열매를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되는, 하나 됨을 향한 경주다.
그러나 오랜 시간 뼛속 깊이 쌓여 온 불신과 불안, 그리고 현실의 고난은 끊임없이 우리를 이 믿음의 경주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원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은 본질적으로 분리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은 무언가를 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하려 한다.
히브리서가 기록되던 당시에도 레위기의 율법 그 자체보다,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규정들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촘촘해져 있었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실패의 원인을 불순종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다시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율법 조항을 스스로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시도 역시, 어쩌면 하나님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깊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 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소속감을 주던 유대 공동체로부터 소외되었고,
자유는 얻었지만 아직 그 자유가 주는 평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삶이 어려워지자, 차라리 익숙한 규율과 통제 속에 머물며 안정감을 느끼는 율법의 삶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낫겠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에게
“약속을 믿고 편안하게 살아라”,
“약속이 있으니 인내하라”는 말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이 흔들리는 이들을 꾸짖지 않는다.
대신 1장에서 10장까지, 예수가 누구이신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끊임없이 설명하며 그들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 준다.
그리고 11장에 이르러, 확신과 함께 ‘믿으며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믿음은 어떤 결단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그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믿음의 조상들조차 처음부터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연약했고, 넘어지고 실수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부모가 자녀의 손을 놓지 않듯, 믿음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사람들조차,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그것을 온전히 받지는 못했다.
이 대조를 통해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이 이미 받은 약속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드러낸다.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이고, 하나님과의 하나됨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 막혀 있었다.
홍해는 건넜지만 요단강은 건널 수 없었던 것처럼,
성소에는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성소로는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막혀 있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 안으로 이제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의 불안과 불신에 머무르지 말자.
나 자신의 상태를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계속 들어가자.
아버지의 품에서 생명의 젖을 빨며, 평안과 믿음을 먹으며 자라 가자고.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당시 사람들은 고난을 하나님의 벌로 여기는 문화 속에 살고 있었고,
어쩌면 개종 때문에 받는 형벌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는 이유는 자녀를 길들이거나 벌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부모의 훈육은 오랫동안 몸에 밴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아 더 자유롭고 편안한 삶으로 이끌기 위함이라고.
약속을 바라보기보다 자기중심적인 판단에 갇혀 있는 사람들,
두려움 때문에 다시 율법으로 끌려가 하나 됨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에게 히브리서는 말한다.
이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너희는 더 자유롭고 더 편안해질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멀리서 이들을 내려다보며 가르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공동체 안에서 소외를 경험했을 것이고, 삶의 불편함과 고난을 실제로 겪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위로에는 공허함이 아닌 확신이 있었고, 자연스러운 권위가 담겨 있었다.
나 역시 그렇다.
예수를 영접했지만, 오랫동안 뼛속 깊이 쌓여 온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자유가 주는 불안을 견디지 못해, 다시 옛 종교적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지 수없이 고민했다.
고난이 찾아올 때면,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벌을 받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길을 이미 걸어온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이는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어떤 이들은 조용히 위로와 격려를 건넸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예수님께 붙어만 있으라”라고.
나는 그들의 말만 들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직접 보았다.
그 삶을 통해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잘못된 길이 아니라는 확신은 점점 더 깊어졌다.
생명은 결코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버지와 나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다.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의 부족한 믿음을 채우며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
그 유기적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요즘 세상은 모든 것을 잘 해내는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목표로 우리를 끊임없이 몰아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각자가 팔이 되고, 눈이 되고, 입이 되어 서로 다른 지체로 한 몸을 이룬다.
우리가 각자 완벽해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온전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큰 안심과 깊은 감사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