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저울
구름이 손끝에 닿을 듯한 높은 산자락 아래, ‘종교성’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시간도 감정도, 마치 째깍이는 시계추처럼 정해진 규칙 안에서만 살아갔다.
‘순종’은 그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자랐다.
아침마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에 눈을 떴고, 정해진 보폭으로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엔 말하지 못한, 고요한 피로가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고, 집들은 모두 흙빛으로 닮아 있었다.
그러나 순종은 알고 있었다.
그 안의 삶은 제각기 다른 무게를 품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외투 속에 반짝이는 보석을 감추고 있었고, 누군가는 낡고 찌든 속옷을 품고 있었다.
어떤 집 안에는 황금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어떤 집의 벽 틈에서는 바람이 슁슁 불어 들었다.
마을 중심엔 회당과 재판소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고, 곳곳에 학교와 교화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의 뜻’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배웠고, 훈련했으며, 무엇보다 침묵하며 살아갔다.
순종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자라났다.
산 중턱에는 황금성과 과학성이 있었다. 각각 화려함과 발전을 자랑하는 마을이었다.
종교성은 담을 높이 쌓아 그 고요를 지켜왔다.
그럼에도, 담 너머의 세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순종 역시 과학성 라벨이 붙은 세탁기와 황금성의 가방을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순종의 부모는 말하곤 했다.
과거의 종교성은 따뜻한 전통과 평온한 질서가 어우러진 곳이었다고. 그 시절엔 진리를 찾아온 이들과, 경쟁에 지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순종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의 종교성은 달라져 있었다.
배움을 핑계로, 물자를 구하겠다며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종교당
순종이 속한 종교당은 마을의 유일한 권력이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충성의 서약과 절대복종을 맹세한 자만이 당원이 될 수 있었다.
당원이 된 사람은 교사가 되었고, 입법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종교경찰이 되어 거룩한 질서를 수호했다.
어린 순종도 종교당원의 배지를 꿈꾸며 자랐다.
마을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물이었다.
종교성은 산자락에 있어 오직 하늘의 비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해마다 강수량이 줄어들며 마을은 점점 메말라갔다.
더 큰 문제는 오수였다.
예전엔 산 아래 강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지만, 황금성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세운 담이 배수로마저 막아버렸다.
결국 마을 안에 큰 구덩이를 파 임시 처리장을 만들었지만, 악취와 벌레, 세균만 늘어갔다.
기이하게도, 마을에 불신과 갈등이 깊어질수록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뭄을 ‘신의 경고’라 여겼고, 종교당은 곧바로 모임과 집회를 제한했다.
사람들 사이의 대화는 줄어들었고, 마음을 나누는 일도 사라졌다.
말은 조심스러워졌고, 감정을 숨기고 참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 창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대중목욕탕과 공중화장실마저 폐쇄되었다.
의인의 집
그즈음, 종교당은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매주의 첫째 날을 ‘거룩한 금식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먹는 것을 줄이면 배출도 줄고, 물도 아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계산이었다.
또 하나.
한 달에 한 번, 물을 가장 적게 사용한 가정에 ‘의인의 집’이라는 명패를 수여했다.
그 얇은 금속 명패는 곧 종교성 최고의 훈장이 되었다.
작은 명패 하나를 위해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아꼈고, 물 한 방울도 소중히 여겼다.
순종의 집도 명패를 받기 위해 식사를 줄이고, 세수도 하루씩 거르곤 했다.
순종은 그 명패가 자신의 경건함을 증명해 줄 것이라 믿었다.
마을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아이들의 놀이터는 텅 비어갔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종교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던 것은 간간이 솟아오르는 샘물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샘물 옆에 담장이 세워졌다.
그 안에는 정갈한 기와를 얹은 ‘현자의 집’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조용히 눈을 돌렸다.
감히 말할 수 없었다.
혹여 그 한마디가 ‘신의 경고’로 돌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현자는 종교성에서 가장 순결하고 지혜로운 이들이라 불렸다.
그들만이 눈부신 흰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옷은 경건함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위계의 표식이기도 했다.
그들은 매일 아침 회당으로 향해 조용히 기도했고,
낮에는 말씀을 연구했으며,
저녁이면 사람들 앞에 서서 '신의 뜻'을 강론했다.
고요하고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배심원들의 판결이 엇갈릴 때면 현자가 직접 재판장에 나섰고,
표정 없는 얼굴로 조용히 내리는 한마디는 곧 ‘절대적 정의’가 되었다.
사람들은 안도했다.
누군가 확신을 갖고 말해준다는 것, 그것은 흔들리는 사람들에겐 마지막 울타리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신의 뜻’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눌렀고,
사람들은 점점 마음을 감추기 시작했다.
경건한 표정을 했지만,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기도서를 든 손과 달리 머릿속에서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저울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종교성에는 오래된 법이 하나 있었다.
'수확의 일정 부분을 회당에 바치고, 주민 모두가 균등하게 나누는 법'
이는 약자를 위한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그 시절의 법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였고, 따뜻함을 나누는 방편이었다.
그 시절엔 비도 넉넉히 내렸고, 샘도 쉬이 마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전통은 이기심 속에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몇몇은 젖은 곡식을 내고 마른 곡식을 받아갔고, 당원들은 질 좋은 농작물을 친인척에게 먼저 배분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곡식을 실은 트럭이 황금성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물건을 싣고 돌아오는 바퀴는 흙길 위에서 덜컹거렸다.
겉으론 모두가 법을 지키는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선 ‘순종’이라는 이름 아래 위선과 편법이 자라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법의 해석이었다.
법의 열쇠는 오직 현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규칙을 계속 바꾸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웠지만,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규칙은 “일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는 냉정한 규칙이었다.
표면적으론 단순했다.
그러나 기준은 점점 복잡해졌다.
작은 실수는 ‘비생산’으로 간주되었고, 벌점이 쌓이면 곧바로 배급에서 제외되었다.
병든 자와 약자는 수시로 바뀌는 법을 이해할 수도, 지킬 수도 없었다.
벌점은 낙인이 되었고, 이름 대신 ‘게으름뱅이’라 불렸다.
남겨진 배급품은 조용히 당원들의 창고로 흘러들었고, 창고문엔 자물쇠가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엔 이불조차 없이 누운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마을 곳곳엔 사이렌과 경보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녁이면 골목마다 경고음이 울렸고, 종교경찰이 나타났다.
누군가 조용히 사라졌고, 다음 날엔 재판이 열렸다.
교화소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더 이상 죄책감도 깨달음도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교양 있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에는 두터운 벽이 쌓여갔다.
서로를 의심하며 점점 고립되어 갔다.
순종도 이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용기 있는 몇몇은 다른 성으로 넘어갔지만, 두려움에 갇힌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는 말 아래 숨죽이며 하루를 버텼다.
종교성은
고여 있는 물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썩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