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국립중앙박물관

by Yule

경의중앙선을 타면 여행하는 기분이 난다. 지연과 연착이 잦다지만 평일 오후에 여유를 가지고 타면 멋진 풍경과 책 한 권을 뚝딱 읽을 수 있다. 나에겐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백마역에 내려 시간여행을 하기도 하고, 양수역에서 내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향해 찬찬히 걸어도 좋다. 그중 가장 아끼는 건 국립중앙박물관을 향해 걷는 발걸음이다. 주로 서빙고역에서 내려 용산가족공원을 통해 걸어 들어간다. 조금 더 빛이 있을 때 야외정원을 거닐고 싶어서이다. 박물관에 입장하면 일단 어두워져야 나오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쌓아가는 유물들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듣곤 한다.


박물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전경을 바라보면 한 편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멀리 남산이 흐르고 잔잔한 거울못에는 하늘빛이 담긴다. 광복과 함께 출범했지만 남산, 덕수궁, 경복궁을 거치며 여섯 차례나 자리를 옮겨 다녀야 했던 국가의 보물창고는 마침내 2005년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어우러진 배산임수의 자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건물은 현대적이지만 어쩐지 생경하지 않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온기 있는 그릇이 되어주는 이 공간은 세상과 한 걸음 떨어져 고귀한 것들을 품고 있다.


누군가 다시 읽어 줄 거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역사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겠지요.


케데헌과 뮷즈의 엄청난 인기로, 언제 가도 인산인해를 이루는 요즘엔 관람계획을 잘 짜야한다. 상설전시실만 해도 7개의 관과 39개의 9,884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만큼,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좋다. 주요 유물들을 어느 정도 훑어봤다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움직여본다. 나는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을 재밌게 본 날엔 <세계 문화관>만 탐구하기도 하고, 근원적인 용기가 필요할 땐 <사유의 방>을 오래 찾기도 한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에 들을 수 있는 <큐레이터와의 대화> 시간을 특히 좋아한다. 유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낼 수 있도록 한 자리에서 복원하고 고증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마치 좋아하는 작품의 메이킹필름을 찾아보는 것만 같다.

실재할 수 없지만 디지털 복원으로 완성된 유물도 새로운 의미의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로비에 깜짝 등장하는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으로 옮겨 담아 지워진 자국, 금이 간 흔적, 닳아 없어진 글자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그 사이로 첨단기술의 안내 로봇이 움직여 다닌다. 시대를 초월한 것 같은 이런 순간은 마치 다른 차원의 문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런 게 바로 박물관이 관람객에게 선물하는 경험이 영감으로 되살아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가까이 시간의 깊이를 발견하는, 우리의 시간이 층층이 포개져 있는 장소도 나에겐 언제나 특별하다. 중·근세관 조선 III실의 위치한 <대동여지도> 앞에 서면 처음엔 크기에 놀라고, 그다음엔 그 디테일에 빠져든다. 꼭 길치여서가 아니라 지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오래된 종이가 건네는 무늬들이 많은 말을 건넨다.


지도는 그저 길을 찾는 약도가 아니다. 그 안에는 공간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았던 기억의 정보가 함께 축적되어 있다. 여러 대에 걸쳐 쌓인 시간의 층위를 한 공간 위에 풀어놓은 촘촘한 점들은 선이 되고 면이 되어,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


건물을 나오니 세상이 깜깜해졌다. 거울못이 바람에 흔들린다. 어쩌면 시간, 공간, 방향 모두가 엇갈려 버린 걸까. 이젠 어디로 가볼까 찬찬히 생각해본다.뮷즈샵에서 나침반을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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