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어둠 속에서도 빛이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는 ‘밝음’과 ‘어둠’이 서로를 지워내지 않은 채 공존한다. 빛과 그림자가 대립하지 않고, 고통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도심 한 복판에 누구라도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자리, 서소문성지 그리고 역사박물관이다.
서울 빌딩 숲 속 가운데 비밀의 정원처럼 자리한 이곳은, 항상 여기에 있지만 눈에 드러나지 않게 존재한다. 얼핏 보면 조각공원인가 할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봐야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서소문 공원을 따라 찬찬히 걸어오면 박물관으로 들어오는 기다란 길을 찾을 수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진적으로 드러나는데, 입구인 빛의 광장은 마알간 하늘빛이 걸린 벽돌건물로 우리를 맞이해 준다. 날씨가 너무 추워 달달 떨며 로비로 들어서니 공간의 온기가 한꺼번에 스민다.
검정, 금색, 붉은색이 교차하며 조화롭게 어우러진 내부는 차분하면서도 고요함이 감돈다. 공간이 머금은 은은한 빛은 그림자와 함께 이 장소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건물 전체가 지하로 이뤄져 있다 보니, 제한적으로 유입되는 자연광을 통해 공간의 깊이감이 걸을 때마다 몸으로 체감된다.
이곳을 찾는다면 순교자의 길을 중간까지 따라 걷다가, 바로 특별전시실로 내려가지 말고 다른 동선을 통해 가볼 것을 권한다. 여기에 서면, 풍부한 층위와 감각이 살아있는 공간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작은 특별 전시를 만나기도 한다. 바로 오른편에 연결된 나선 계단은 세 개의 층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데, 정하상 바오로 경당에 들러 성모님께 인사드리고 지하 3층까지도 바로 내려갈 수 있다.
그리고 콘솔레이션 홀에 도착한다. 지하 3층에는 상설 전시관도 있지만, 순교한 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진 콘솔레이션 홀은 그중 가장 신성한 공간이다. 극장 같기도, 무덤 같기도 한 이곳은 미래 공상과학 영화 속 장면 같은 신비로움이 서려있다. 사면이 깜깜한벽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어디에서도 시야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여기서 미사를 보는 날이 아니라면 제대를 뒤에 두고 하늘 정원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득히 멀리 있는 듯 하지만 그 시선은 언제나 가깝게 머물고 있음을. 창 너머 동이 터 오르는 듯한 하늘 공원의 빛이 세상과 나를 다시 이어놓는다.
하늘공원에서 잠시 잠깐 숨을 고르고 나면 하늘길로 다시 한번 공간이 변주된다. 미디어 아트로 구현된 좁은문 'Through the narrow gate'은 흐르는 물결을 따라 빛들이 출렁인다. 신기하게도 이곳에 서면 흔들림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작은 믿음이라는 씨앗하나가 조용히 발아하여, 작은 숨을 불어넣는다. 빛은 그림자를 이기지 않고, 그림자는 빛을 삼키지 않는 이곳이 주는 뜨거운 울림이 아닐까. 그래서 이곳에 오면 의무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고해성사를 보게 된다. 게으른 순례자에게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데비 한 작가님의 특별전 마지막 날이었다. 건물 곳곳에 유난히 사진작가들이 많다 싶었는데, 덕분에 작가님을 눈앞에서 직접 만나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인간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존재(Being이 아닌 Becoming)로 바라보는 작가님의 철학적 사유가 공간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김종태 작가님의 기증 작품전과 도서관까지, 오늘처럼 유난히 추운 날에는 한 장소에서 이렇게 다층적인 탐험을 즐길 수 있는 문화복합공간이 최고의 선택이다.
지하의 공간들을 층층이 빛과 그림자로 쌓아 올린 이곳은 신앙의 증언뿐 아니라 다름을 이유로 스러져 간 수많은 이름 없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있다. 서소문 성지는 과거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손길을 건넨다. 일어나서 비추라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