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서울로 7017

by Yule

오랜만에 옛 동료를 만났다. 신기하게도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마치 시공간의 태엽이 저절로 감기는 듯하다. 반나절을 한자리에 앉아 있어도 이야기가 샘물처럼 흐른다. 시간과 물리적 제약 속에 묶여 있던 긴 쉼표가 열린 자리엔, 미처 건네지 못했던 안부의 말들이 제 온도로 전해지는 듯하다.


이제 엄마가 된 친구의 시간을 더 붙잡을 수 없어 서두르는 귀갓길, 그래도 그때 그 시절 가장 기-인 버전의 퇴근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혜화역에서 서울역 근처 친구 집까지 1시간 30분 정도. 가끔 익선동이나 힙지로 어느 카페에서 길을 잃기도 하지만, 업무강도가 120% 넘는 날엔 이 길은 서로에게 내려주는 정신건강회복 처방이기도 했다.


이 길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언제나 서울로다. 회현역에서 시작되는 서울로 7017은 고층 빌딩 숲 위에 떠있는 재미난 공중정원이다. 고가도로였던 길 위에는 식물도감을 펼쳐놓은 듯 다양한 식물들이 놓여있어 하나씩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호기심 천국인 우리들은 궁금한 게 있으면 검색해 보고 주도적인 탐구생활을 하곤 했다. 일단 누가 뭐래도 신호등 없이 도시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프랑스 유학을 했던 친구는 파리의 쿨레 베르트를 떠올리며 너무 삭막한 공중 오솔길이 아닐 수 없다며 고개를 젓기도 했지만, 여전히 이곳은 복잡한 도심을 뒤로하고 자유롭게 걷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아직 겨울이라 동면중인 식물들 사이로, 우리는 천천히 걸으며 조금은 달라진 서로의 시간을 나란히 두었다.


서울로의 끝까지 걸으면 만리동에 닿는다. 예전에는 서울역 근처에서 내려가 다시 빨간 버스를 타는 나를 친구가 배웅해 주었지만, 오늘은 서울로의 끝에서 끝까지, 빛이 모여드는 곳까지 시간을 늘려 보기로 했다.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은 서울 미술관 공공프로젝트로 만든 야외 전시물이다. 도시의 경관을 다양한 각도로 반사해, 빛이 부딪히며 생겨나는 잔물결의 일렁임을 고요히 담아낸다. 낮에는 하늘과 구름을, 저녁에는 건물의 불빛과 사람들의 그림자를 비추는 곳에서 그렇게 동행의 하루가 물들어 간다. 언제라도 좋으니 같이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