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

비는 눈물이요, 천둥은 말씀이다_아누라다푸라

Sacred City of Anuradhapura

by Yule

스리랑카 탐구생활에 흠뻑 빠진 요즘. 랑카에 대한 책과 자료들을 찾으며 열심히 공부 중이다. 역시 한 나라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살아온 궤적, 그리고 그 기록인 역사가 빠질 수 없다. 그래서 나름 4월 긴 연휴를 시작으로 스리랑카 문화 삼각지대 유산 답사를 기획해 보았다. 부제는 불교유적이 밀집한 중부내륙과 가톨릭이 있는 서부 해안지역이 퐁당퐁당 함께하는 종교 대통합이다. 우선 스리랑카의 중세도시이자 2,500년 전부터 1,000년 넘게 스리랑카 왕국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 도시였던 아누라다푸라로 서문을 열었다.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오랜 불교 왕국의 수도이자 도시 전체가 1982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곳으로 아직도 기품과 여유가 살아 있는 신성도시이다.


콜롬보에서 출발. 새해 전날이라 도로에 차가 많지 않아서 인지 4시간 정도 달리니 숙소에 도착했다. 단아한 이 도시에는 큰 규모의 호텔이 없어 작고 아담한 숙소를 선택했는데 푸르름 속에 적막함이 이 도시과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첫날이니 늦은 점심을 먹으며 한낮의 부서지는 태양을 피해보려 조금 게으름을 피웠더니 첫 일정을 위해 가는 길에 뭉게뭉게 먹구름이 우리를 뒤따른다. 그리고 후두둑 빗방울이 세차게 창문을 두드린다. 내려오는 뜨거운 햇살과 맨발 화상을 대비해 모자와 양말은 야무지게 준비했는데... 비가 올 줄이야.. 오늘 일정은 다 야외 유적지인지라 머릿속은 일정 수정으로 바빠졌다.

바라만 보아도 힐링이 되는 초록 가득한 숙소

일단 첫 행선지인 이수르무니야 사원 (Ishurumunyia) 사원 밖에서 잠시 비가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 장대비 속에서도 가족 단위의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연이어 사원으로 들어선다. 고민 끝에 일단 계획을 우회하여 아누라다푸라에서 14km 동쪽으로 떨어진 미힌탈레(Mihinthale)에 먼저 향한다. 가는 길에 비가 그친다면 너무 감사할 것이고 아니라도 차창밖으로 도시 풍경을 구경할 수 있을 테니까. 간간히 천둥과 번개가 치긴 했지만 다행히도 비가 많이 잦아들었고 무사히 입구에 도착했다. 비에 젖어 한층 운치가 가득해진 사원 초입엔 산 정상에 있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봉안한 마하 세야 불탑까지 1840개의 계단이 아득히 펼쳐져 있다.

차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다

스리랑카 불교의 최초 전승지, 미힌탈레


스리랑카 미사카산과 추티아산을 품은 미힌탈레는 인도의 아소카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BC 247년에 데바남피야티사 왕에게 처음으로 불교를 전승시킨 곳이다. 비가 내려 바닥이 흙탕물이 되었지만 맨발을 하고 미힌탈레에 첫발을 내디뎠다. 조금 더 찬찬히 돌아보며 공부했던 내용을 찾아보고 싶은데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니 마음이 급해진다. 마힌다 장로는 48년간 인도와 랑카를 오가며 설법을 했는데 그런 연유로 이곳 사람들은 마힌다 장로를 등명자, 즉 섬에 등불을 밝힌 자로 기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그 오랜 역사 속에서도 그 등불을 꺼트리지 않은 채 진리의 빛을 밝히고 있었다.


언제나 나와 함께 기쁨으로 예수님을 뵈어주는 동행에게 고마운 마음과 오늘은 온전히 불교의 시간인만큼 부처님 얼굴을 함께 뵙고자 빗물로 촉촉이 젖은 돌산 암벽등반에 나섰다. 정상에 올라서자 새햐얗게 빛나는 부처님이 인자한 미소로 맞아주시고 그분이 내려다보는 풍광을 함께 눈에 담았다. 뭐랄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 서려 석양에 물들어 가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진한 감동이 전해졌다. 보리수나무 아래로 조용히 세상을 적시는 빗물처럼.. 내 마음을 가만히 두드리는 이 순간

부처님의 시선
빗속에서도 순백으로 빛나는 분
보리수나무 아래 잠시 비를 피해본다.

바위 위의 작은 사원 그리고 깨달음의 나무


다행히도 오는 길에 비가 개이고 파란 하늘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조금 늦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계획했던 사원들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장소는 바위 위에 조성된 스리랑카의 최초 사원인 이수루무니야이다. 바위를 파내 듯이 지어진 불당과 바위 위에 다고바 그리고 밝은 색으로 칠해진 법당까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뭔가 이색적인 느낌이다. 오전에 온 비로 사원 입구는 작은 웅덩이가 생겨 발목까지 찰랑거린다. 천연 동굴을 활용해서 지어진 지라 법당에 제비집이 그대로 있어 작은 새가 날아다니고 작은 터널로 박쥐들까지 보인다. 동굴 사원 위에 올라 보니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이수루무니야 사원
바위 사원 위에서 바라본 아누라다푸라
귀여운 발자국 콩콩

발길을 재촉해 서둘러 향한 곳은 스리랑카 최대의 불교 성지인 스리 마하보디 (Sri Mahabodhi) 사원이다. 계속 맨발로 사원에 들어서야 하다 보니 아예 입구부터 신발을 벗고 이동하려고 했는데... 비가 많이 와서 였을까 옆 차 밑에서 무려 뱀이 등장한다. 두둥. 주차장을 지키는 네 마리의 개가 용맹하게 짖어 주어서 망정이지 정말 온 몸의 촉각이 머리끝까지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주변을 지키던 경찰과 군인들이 와서 풀숲으로 뱀을 쫓아 주었지만 이제 정말 스리랑카에서는 어떤 야생동물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미힌탈레에서 등장했던 인도 아소카 왕이 이번 장소에서도 재등장하는데 이번엔 왕자가 아닌 공주님이 주인공이다. 아소카 왕의 공주인 상가밋타도 스리랑카 최초로 비구니 승단을 만든 비구니 장로인데 그녀가 석가모니가 성도한 보리수 가지를 부다가야에서 이곳에 가지고 와서 데바남피야티샤왕이 이 사원에 심었다고 한다. 이 보리수는 2,000년이 넘게 이곳에서 자리고 있는데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나무가 화재로 사라지는 바람에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성수로 남아 추앙받고 있다.


사원에 들어서자마자 입구에부터 익숙한 악기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불교 방송국이 있어서 매일 아침 북소리와 피리소리를 알람으로 눈을 뜨는데 바로 그 소리다. 새해 하루 전날인 만큼 가톨릭으로 치면 설날 합동미사 같은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처님께 봉헌될 깨끗하고 생명이 가득한 꽃을 든 행렬이 이어지고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원에는 깨달음의 나무와 성스럽게 새해를 맞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보리수나무를 형상화 한 사원 입구
가장 귀한 마음을 담아 서로 나눈다

정말 놀라운 건 보리수나무를 향한 사람들의 놀라운 정성과 사랑이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19세기에 코끼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돌축대를 쌓고, 1966년에 금제 울타리를 쳤으며 나무를 지탱하는 받침대까지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 울타리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 사람들은 나무 주변을 돌며 참배하고 있었다.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곳을 신앙의 중심으로 보존하고 살아내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이전에 사용했던 돌에 번호를 매겨 다시 돌축대를 쌓았다
나무를 보호하는 모든 것들은 금빛으로 빛난다


해가지고 비를 많이 맞은지라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의 순례길을 마무리했다. 숙소로 가는 길 아누라다푸라의 탑 중에서 가장 큰 루완웰리세야 대탑이 멀리서 반짝인다.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던 아누라다푸라 시대는 남인도에서 내려온 북부 타밀인과의 500년 이상의 전쟁으로 10세기에 마감된다. 하지만 오래 번영했던 도시의 유적들은 결코 잠들지 않고 부처의 숨결이 서린 보리수나무를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여행 계획 세우는데 일정부터 불교에 대한 이해까지 정찬주 작가의 '불국 기행'을 많이 참고했다. 책 속에 "비는 아난의 눈물이요, 천둥은 부처님 말씀이다."라는 문구가 마음에 남았었는데 왠지 모든 순간 비와 함께한 이번 여정과도 맥이 닿아있는 느낌.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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