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

천공의 성, 시기리야

Sigiriya Rock, A UNESCO World Heritage

by Yule

시기리야엔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다. 섬의 내륙 중심에 있어 북부나 동부 여행길을 지날 때마다 들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시기리야 유적지를 올라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너무나 유명해서 어쩌면 우선순위에서 미뤄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멀리 바위의 압도적인 크기만으로도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진입로부터 해발 377m 바위산을 오르기까지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늦은 오후 일행과 함께 유유자적 유적지에 다다랐다. 시기리야 바위가 집채만 하게 보이는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서 인지 어쩐지 좀 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동물 친구들이 가득한 입구를 지나면 본격적인 진입로가 시작된다. 시기리야 정상에 있는 왕궁터로 가기 위해서는 8백 미터 길이의 길을 지나야 하는데 그동안 고대 유적지를 많이 다녔지만 바위 사이로 정렬된 옛 영광의 흔적들이 자꾸만 나의 발길을 멈춘다. 물의 정원, 돌의 정원, 여름 궁전, 테라스 정원 이름만으로도 시간과 공간의 마법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덧없는 역사의 흔적들


진입로가 끝나면 드디어 돌계단 그리고 크고 작은 바위 문이 등장한다. 늦게 도착해서인지 가는 길에 계란과 꿀을 섰은 석회 반죽으로 그렸다는 프레스코화는 볼 수 없었지만 석양을 보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발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돌계단을 한참 오르니 라이언 플랫폼이 있는 평지가 나타난다. '사자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성의 입구인데 시기리야가 싱할라어와 '사자'를 뜻하는 '싱허'와 언덕을 의미하는 '기리야'의 합성어이니 사실상 이제야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번영한 아누다라 푸라 왕국에서 왜 이리 높은 바위산에 왕궁을 세운 것인지는 먼 역사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고대 왕국의 기틀을 확고히 한 다투세나 왕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왕이 되기 전 부인에게서 난 '카파 샤'라는 아들과 왕이 된 후 혼인한 귀족 여인에게서 '목 갈라냐'가 있었다. 당시 여론으로 세자의 자리가 동생에게 가자 '카파샤'는 아버지를 참수하고 스스로 왕위를 가져 절대 권력을 갖는다. 그리고 언제 자신을 치러 올지 모르는 동생을 피해 높은 시기리야 바위에 요새를 만든 것이다.


강력한 군주로서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그는 입구에서부터 대놓고 사자의 거대한 두 앞발을 드러냈다. 누구도 함부로 통과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 힘을 기른 '목갈라냐'가 쳐들어 오자 '카파샤'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계단이 있어도 오르기 힘든데 당시 평지에 짓기도 어려웠을 지상 3층짜리의 왕궁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벽돌과 목재를 날랐을지. 그 안에 목욕탕까지 있었으니 아래 호수에서 물을 끌어올리기까지 어쩐지 공간 속에 사람들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제 철제로 만들어진 흔들리는 나선형 계단만 오르면 정상이다. 바람이 불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래도 앞만 보고 걷고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밀림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원숭이들이 있는데 바위엔 갓 태어난 듯한 아기와 원숭이 가족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이라 아기를 보호하려 꼭 안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럽다. 마침 포야라 구름 뒤 실루엣을 드러낸 달무리 그리고 지난번 방문했던 피두랑 갈라도 보인다. 바위산에 매달려 보는 파노라마뷰는 어쩐지 아찔하지만 대자연에 품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왕궁터는 여러 책 속 사진에서 이미 보았듯 쓸쓸한 석축과 계단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나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건 옛 영광의 잔재가 아닌 지금 바로 이곳이었다. 밀림 속 길어지는 바위산의 그림자, 바람에 산들거리며 나에게 말을 건네는 오래된 나무, 흩날리는 사자의 갈기처럼 노랗게 저물어 가는 석양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경찰 분이 더 늦으면 야생 코끼리가 나올 수 있다고 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려왔지만 그 찰나의 그 시간이 오랜 여운으로 남아있다. 유적이 아니라도 꼭 와볼 만한 공간, 힘든 산행을 감안하고도 또 한 번 와보고 싶은 곳이다. 다음엔 일출과 함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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