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걷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Kol-Tor

by Yule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작년부터 여행사 투어 리스트 중에 유독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사실 알틴아라샨의 아라콜 패스 호수가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당장 나의 체력으로 11시간의 트래킹은 무리였다. 수도 비슈케크에서 차량으로 두 시간 남짓,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중급(?!?!? 이라고요?) 난이도의 콜토르 (Kol-Tor).

한낮 기온이 40도까지 치솟는 요즘, 더 더워지기 전에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해보고 싶은 건 꼭 해봐야만 하는 나를 알기에, 결국 예약 버튼을 누른다.


수도를 벗어나 한동안 비포장 도로를 온몸으로 신나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산 초입에 다다르고 본격적인 등산 준비가 시작된다. 오는 길에 가이드가 3단계의 트래킹 구간이 어떻게 펼쳐질지 대략 설명을 해 주었기에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그려졌지만, 저 멀리 구부구비 펼쳐진 능선을 바라보니 벌써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출발은 1,800m 고도에서 시작된다. 숲 속을 따라 걷는 오솔길로 그늘이 있어 한국의 등산길과 비슷하다. 비교적 완만하지만 그래도 미끄러운 벽도 타야 하고, 첨벙이는 냇가도 건너며 산 넘고 물 건너가는 한 시간가량의 여정이다. 처음으로 준비한 등산스틱도 야심 차게 꺼내어 보았는데, 박자가 안 맞는 건지 로봇처럼 삐걱댄다.

간단하게 싸 온 도시락을 먹고 숲을 벗어나면 본격적으로 두 번째 구간에 들어선다. 그야말로 멀리 고산의 초원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경사도는 점점 가팔라지고, 흙길은 자갈길로 바뀌며 발걸음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눈앞의 시야가 탁 트이면서 산봉우리들과 빙하수가 흐르는 계곡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니 볼거리는 많아지는데, 초행자인 나로서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숨은 차오르고,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바쁘게 일행들을 쫓아갈 뿐이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면 풍경은 항상 같은 모양이고, 그저 산 능선이 겨우 1cm쯤 자라 있었을 뿐이었다.


“일상의 반복에 지쳐 자연으로 쉬러 왔는데,
나는 또 여기서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고 있네.”

지친 푸념이 막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 할 때쯤, 등 뒤로 한줄기 산들바람이 살포시 다가와 조용히 땀을 식혀 준다. 한참을 걸어온 것 같은데도 여전히 그대로인 듯한 내 좌표에 좌절이 밀려올 즈음엔, 산 위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눈앞에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마치 이 순간을 즐겨보라는 다정한 속삭임처럼. 자연스레 흐르는 길동무의 어루만짐이랄까.


이왕 늦은 김에 잠시 바위에 앉아 목을 축이며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 나이가 들면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될 거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조금 더 높이 올라왔기에 비로소 보이는 1cm의 풍경들이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는 내 안에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때론 한 뼘 더 세상을 품게 하고, 내 걸음에 더 깊은 인내를 심어주었달까?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말이다.


조금 더 올라서면 세 번째 가장 힘든 구간이 시작된다. 경사도가 정말 심해 여러 번 미끄러질 뻔했다. 수없이 ‘살려주세요” 구호 신호를 내적으로 외칠 즈음, 마침내 평지가 나타나고 해발 약 2,750m에 자리한 Kol-Tor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정말 투명한 물감을 풀어놓은 듯 신비로운 색채를 뿜어내는 호수 앞에 서자, 거짓말처럼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내리쬐는 햇살에 초록 산능선이 녹아 물가에 스며든 듯, 호수는 시시각각 다채로운 빛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오랫동안 풍경을 바라보며 자연 속에 몸을 누이고, 이곳까지 올라오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축복 같은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지는 않지만, 언제든 어디라도 내 마음속에 살아 있을 이 에메랄드빛 미소를 내 안에 가득 담아 본다. 인터넷의 켜지지 않아 음악을 들을 순 없었지만 절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는 이곳에선 포근한 행복이 흐른다. 어쩌면 나의 삶 속 심연에도 이토록 영롱한 보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길 위에서 계속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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