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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Jan 21. 2021

디 에센셜 _ 조지 오웰

에세이

소설 <1984>와 조지 오웰을 대표하는 에세이 일곱 편이 담겨져 있다. 그중 에세이 일곱 편을 먼저 정리해보고자 한다.



1924년에는 버마 경찰에서, 1925년에는 버마 교도소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 <교수형>과 <코끼리를 쏘다>. 몇 분 후면 죽을 사형수가 발이 젖을 것을 우려해 물구덩이를 피해가는 모습을 통해 사형수가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님을 각성하지만 사형이 집행되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형이 집행된 직후 불과 9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서로 다정하게 술을 마신다. 제국군에게 식민지 유색인종의 죽음에 대한 애도 따위는 없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유럽인들을 조롱하고 곤혹스럽게 하는 버마인들과 코끼리 사살 현장에서 군중의 힘으로 백인 경찰을 압도하는 표현은 제국주의에 대한 역설적인 풍자라고 느껴진다. 돈으로 환산된 쿨리의 몸값은 코끼리 한 마리만도 못하다는 백인의 이야기야말로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코끼리가 집을 부수고 다닐 때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총으로 쏴서 죽일거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흥분하는 민중들과 침략자는 맥락을 같이한다. 즉 백인이면서도 소수자의 입장을 경험한 오웰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살해당할 한 마리의 코끼리와 다를 바가 없는 처지인 것이다.


528 - 529.

제국주의는 악마니까 내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서 빨리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 삶에도 좋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론적으로, 물론 대놓고는 말을 못 했지만, 모든 버마 사람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버마 사람들을 통치하는 영국 압제자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 보자면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나는 내 직업을 극도로 증오했다. (...) 영국의 식민 통치가 납작 엎드린 민족의 의지를 영원토록 짓밟고 있는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폭정이라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총검으로 나를 조롱하는 승려의 뱃속을 푹 쑤셔 버리는 것만이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제국주의 통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부작용이다.

(코끼리를 쏘다)



오웰은 에세이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 통해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밥 크래칫 가족의 행복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불완전한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허버트 조지 웰스가 작품에서 묘사하는 유토피아 ㅡ 무지, 전쟁, 빈곤, 질병, 기아, 공포, 좌절, 불결, 공포, 과로 등이 사라져버린 세상 ㅡ 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겠느냐며 물음표를 던진다. 그와 동시에 바람직한 유토피아는 모두 다 완벽을 전제로 하지만 행복은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고상한 휘넘족을 들어 다툼, 무질서, 혼돈, 위험이 없는 동시에 육체적 사랑, 열정도 없는 합리적인 삶이 과연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렇다고 감각적인 인생이라고 다르겠냐며 반문핟. 볼테르의 <성처녀> 첫 부분을 예시로,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삶 역시 다른 의미에서 지루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종교와 자본주의 입장에서 천국과 행복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던 오웰이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인류애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지만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그는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폐해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에도 비판적이다. 그가 말하고자 함은 평화의 기준은 현재다. 전쟁 중에는 전쟁이 없는 세상이,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는 빈곤이 없는 세상이 천국이다. 따라서 시대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인류애 뿐이다.


560.

인류에게는 추구해야 할 노선이 있고, 거대한 전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전략의 세세한 사항을 예언하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완벽한 상태를 상상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내면이 텅 비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에서는 [이에로파지타커] 출간 300주년을 기념한 펜클럽 대회에 참석해 당일 네 명의 인사가 연설한 내용을 떠올리며, 그들이 작가의 정치적 자유를 언급하지 않았음과 출판의 자유가 비판하고 반대할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임을 지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결국 그 회의는 검열에 찬성하는 시위였다고 말한다. 작가와 예술가의 창작과 독립은 경제 세력에 의해 잠식되고 있고, 무엇보다 독립을 옹호하는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언론과 출판이 진실을 보도할 권리, 즉 지적 자유의 상실이다. 지적 자유의 적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규율 대 개인주의 문제로 몰아가며 진실 대 비진실의 문제는 뒷전으로 빼버리고 매수되지 않는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낙인을 찍어 지적 자유를 공격한다. 이런 식으로 논쟁은 문제의 본질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간다. 사실 왜곡과 억압에 의한 문서 위조 등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전체주의 국가들이 조직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비상 시국에 의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으로 또한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오웰은 사상의 자유를 위협하는 적은, 멀리 보면 지식인 내면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열정이 약화되는 것이 가장 심각한 증상이라고 짚는다. 논쟁을 피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순수하게 완전한 비정치적인 문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널리스트든 문학 작가든 강요된 글쓰기는 창작 재능의 고갈을 불러올 뿐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자유주의적 문화가 종말을 고한다면 문학도 함께 소멸될 것을 우려하며 본격적인 기계화 시대에 소설의 자리는 영화와 라디오가 대체될 것이고, 광고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한 선동과 싸구려 저널리즘, 주제와 방식이 미리 정해져 공장에서 찍어내듯 나오는 결과물들은 대량 생산된 공산품과 다를 바 없음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사상의 자유가 파괴되면, 그리고 작가가 자발성을 갖지 않으면 문학은 운명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일갈한다.


577.

책이란 어떻게 써지는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 아닌 이상, 문학은 경험을 기록하여 동시대인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 단순한 저널리스트와 가장 비정치적인 창작 작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와 영어>에서 오웰은 최초의 원인이 강화되고, 그 강화된 형태에서 동일한 결과가 만들어지고, 이런 방식이 무한 반복되면서 영어가 쇠락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해 영어 표현 다섯 가지의 예문를 들어 습관적으로 사용되는 문장 상의 오류와 식상한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정확성의 결여를 지적한다. 모호함과 무능이 섞여 있는, 은유가 죽어가고 있음을 '쓰레기같은 은유'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판한다. 은유는 원래의 의미가 왜곡된 채 사용되고 있으며, 이는 작가가 자신의 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작동어 또는 언어적 의수족을 사용함으로써 문장에 있어 능동태보다는 수동태를 선호하게 되고 진부한 표현들을 심오한 의미가 있는 듯 가장한다. 또한 허세를 부리는 용어는 소박한 표현을 저해하고, 불필요하게 형용사를 붙여 치장한 문장은 편향적인 의견을 미화시킨다. 비평글에서는 길기만 할 뿐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 정상처럼 돼버렸다. 더불어 당대의 작가 중 자신의 생각을 표를 만들 듯 정확하고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하면서 최악의 글쓰기는 이미 다른 누군가의 결과물을 완전하게 속여서 내놓은 글이며 모호한 가정법이나 상투 어구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면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고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반항적 기질이 있는 작가가 당의 노선이 아닌 작가 개인의 의견을 표명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정치적인 글은 대체로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는 주장에 긍정하면서 정치 전반의 분위기가 안 좋을 때 언어가 병들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타락한 언어는 여러 면에서 매우 편리하고 우리를 계속 유혹한다. 그러나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역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음을 강조ㅎ 하는데, 오웰은 글(산문)을 쓸 때, 어느 한 구체적인 사물을 생각할 때 단어 없이 생각하고, 그러고 난 후 마음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것을 언어로 묘사한 후 거기에 들어맞는 정확한 단어를 찾을 때까지 찾고 또 찾으라고 조언하며, 의미가 단어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로 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준다.


이 에세이를 읽은 후 대체로 자주 사용하는 문장에 대해 곱씹어 봤다. 우리는 주로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에 대한 글을 쓸 때 짐작과 수동태 문체를 흔히 사용한다. '~이다', '~한다' 보다는 '~ 것 같다', '~ 된다'라는 문장을 훨씬 많이 쓰고 있는데, 단순한 대화 뿐만 아니라 문장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처럼 오웰이 지적한 부분은 이미 현재에도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작용임을 새삼 알 수 있다. 굳이 영어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류들을 짚어내 놀랍다.


616 - 61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 정치적인 말과 글은 대부분 옹호할 수 없는 것을 옹호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영국이 인도를 계속해서 통치하는 것, 러시아에서 벌어진 숙청과 추방,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과 유사한 일들은 옹호하자고 하면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나 야만적이라 수용할 수 없는 그리고 당이 언명하는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언어는 대부분 완곡어법, 논점 회피, 그리고 매우 불명료한 모호함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무방비 상태의 마을이 공중 폭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시골로 내쫓기고, 가축은 기관총 세례를 받고, 오두막은 소이탄을 맞에 불에 탄다. 정치적 언어는 이 모든 행위를 '분쟁 제거'라고 부른다. 농지를 강탈당한 수백만의 농민들이 갖고 갈 수 있는 것만 간신히 챙겨 피난길에 오르면 정치적 언어는 이를 '인구 이전'이나 '경계 조정'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못하고 수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거나, 목 뒷덜미에 총을 맞고 죽거나, 북극의 벌목장으로 끌려가 괴혈병으로 죽으면 정치적 언 이를 '불신분자 제거'라고 부른다. 이런 용어는 마음 속에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게 하면서 무엇인가를 명명할 때 필요하다.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자신의 성장배경을 간단하게 서술하면서 어린 시절 환경이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과 작가마다 글을 쓰는 네 가지 동기를 이야기한다. 온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이 그 네 가지다. 온전한 이기심이란 다재다능하고 의지가 강해 죽을 때까지 기어코 자기의 삶을 살아가려는 부류이고, 미학적 열정은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이나 글쓰기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느낀 바를 타인과 나누고 싶은 욕망이 큰 사람들이다. 역사적 충동은 진실을 찾아내 후세에 보존해 두려는 욕망, 정치적 목적은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이들이다. 오웰은 정치적인 편향이 없는 책은 이 세상에 단 한 권도 없다고 말한다. 예술이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이력 ㅡ 제국 경찰, 가난과 좌절, 권위에 대한 타고난 혐오, 스페인 내전 ㅡ 을 들어 전체주의에 맞서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으며,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어 독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듣게 하고자는 바람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누누이 정확한 글쓰기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보도된 실제 신문기사를 인용한 [카탈로니아 찬가]를 예로 들어 좋은 소설이 보도물이 되었음을 인정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동물농장] 역시 의도한 바가 있는 작품임을 인정하면서 작가가 시대에 해야할 의무를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오웰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다.


633 - 634.

내가 굳이 이런 배경 설명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모르고는 그 작가가 글쓰는 동기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쓰는 글의 주제는 그 작가가 살아가는 시대에 의해 결정되겠지만 ㅡ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혼란스럽고 혁명과 같은 시대에는 ㅡ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작가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 특정한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된다. 작가는 마땅히 자신의 기질을 잘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머무르거나 비뚤어진 기분에 매몰되는 상황에 고착되지 않아야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면 글을 쓰려는 충동 자체가 사질 것이다.


642.

책을 쓰는 일은 고통스러운 병과의 지루한 싸움처럼 끔찍하고 진 빠지는 일이다. 저항하거나 이해할 수도 없는 귀신에 홀리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 귀신은 아기가 자기를 봐 달라고 울어 댈 때의 본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개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읽을만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훌륭한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 내가 쓴 작품들을 돌이켜봤을 때 생명력이 부족하고, 화려한 묘사에만 집착하고, 의미 없는 문장만 나열하거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실없는 소리만 남발한 글에는 언제나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었다.



오웰은 <작가와 리바이어던>을 통해 문학 창작가가 당면한 시대성을 외면할 수도 없고(해서도 안 되고), 집단에 끌려다니 것 또한 안된다고 말하면서 현실적인 문제와 창작 사이에서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것들을 수행하되 그에 따르는 신념까지 받아들일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치적으로 속한 당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지만 자신의 글이 당과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당의 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당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작가가 정치적인 글을 쓸 때에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국외자로서, 게릴라로서 써야 한다고,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라고 당부한다. 이 대목에서 갈등의 시기를 살아가는 작가의 한계와 딜레마를 자조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글이 가치가 있으려면 온전한 자아의 산물이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소설 [1984]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온전한 자아, 그리고 개인의 역사.


656.

나는 어떤 특정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문학적 진실성이 훼손될 위험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 투쟁의 영역 밖에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와 개성주의 같은 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실 '주의'로 끝나는 단어는 그 단어만 들어도 선전의 냄새가 풍긴다. 집단에 대한 충성은 필요하지만 문학이 개인의 산물인 한, 문학에는 독이 된다. 집단에 대한 충성이 문학 창작에 영향을, 그것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허용되는 순간 창의성은 왜곡되고 사실상 고사한다.


661.

작가의 글이 가치가 있는 한 그 글은 언제나 한층 온전한 자아의 산물이어야 할 것이다. 이 자아는 가까이에서 진행되는 일을 기록하고 그 일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속아서 그 일의 진정한 본성을 잘못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자아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는 지진처럼 갑자기 닥친 재앙이 아니다. 전쟁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그저 전쟁 때문에 앞당겨진 것일 뿐이다. 수십 년 전부터 이런 종류의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예견됐다. 일정 부분 해외 투자로 벌어들이는 이윤, 식민지라는 확실한 시장과 거기서 들여오는 값싼 원자재에 의존해 온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은 19세기부터 극도로 위태로워졌다. 조만간 안 좋은 일이 터져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맞춰야만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되며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전 영국인의 생활 수준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도 좌익 정당들은 반제국주의를 큰 소리로 외칠 때조차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알리지 않았다. 좌익 정당들은 오늘날 영국 노동자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수탈해서 어느 정도 혜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가끔 인정했으나, 수탈을 중단해도 우리 경제가 어떻게든 계속 번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했다. 크게 보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한다는 말에 사회주의에 끌리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영국 노동자들은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착취하는 사람들이라는 잔인한 진실이 존재한다.   (p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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