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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Sep 02. 2021

아킬레우스의 노래

독이 된 사랑


소설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고 가장 대중적인 아킬레우스의 신화를 줄기로 하고 있다. 익숙한 스토리일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일리아스>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던 파트로클로스가 화자로 나와 아킬레우스와의 첫만남과 우정, 사랑, 그리고 트로이 전쟁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이야기가 곁들여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소설로 완성했다.








유력한 귀족 집안의 아들을 과실치사로 죽게 한 파트로클로스는 왕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국외 추방 당해 13세에 프티아로 보내진다. 그곳에는 여신 테티스와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킬레우스가 있다. 같은 또래의 두 소년은 첫만남 이후 파트로클로스 어머니의 리라가 계기가 되어 가까워져 우정을 쌓아가고 점차 우정은 사랑이 된다. 결국 이 사랑이 두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되고 말지만.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재미다. 신화가 기본적으로 갖는 재미에 더 세밀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과 감성 가득한 이야기와 문체가 보태져, 독자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사랑, 파트로클로스를 향한 테티스의 지독한 미움, 아킬레우스가 유약하기만 한 파트로클로스를 선택한 이유 등 모든 것이 납득되고 공감할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절대적인 사랑에 마음 아프다.








전쟁에 가담하지 않으면 평범한 한 나라의 왕으로서 평탄한 삶을 살 것이나 참전한다면 길이 남을 영웅이 되는 대신에 그 전쟁터에서 요절할 것이라는 예언에 테티스도, 아킬레우스도 갈등한다. 그러나 지존이 되기 위해 선택한 죽음. 그리고 헥토르가 죽기 전까지는 아킬레우스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예언은 파트로클로스를 그나마 희망에 들뜨게 한다. 헥토르만 죽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두 남자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내가 왜 그 사람을 죽이겠어.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 말을 아킬레우스는 몇 차례 반복하며 강조하는데, 독자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앞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기에 그가 이 말을 되풀이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아린다.



그리고 전쟁이 10년을 향해 갈 무렵에 전해진 최고의 미르미돈이 죽을 거라는 마지막 예언. 아직 헥토르가 죽지 않았으므로 아킬레우스는 아니다. 그렇다면 죽을 운명에 놓인 그 최고의 미르미돈은 누구일까?







아들이 신이 되기를 바랐건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자에게까지 손을 뻗친 테티스, 동생의 아내가 납치됐다는 명분으로 경쟁 국가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세력 싸움을 벌인 아가멤논, 영광과 부를 위해 기꺼이 참전한 그리스 국가들의 왕. 고대든 현대든 어른들의 탐욕으로 아이들이 죽는다. 모든 전쟁이 그랬다. 영화 <덩케르크>에서 도슨이 고립된 젊은 군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덩케르크로 향하는 요트를 돌리라는 장교의 다그침에 "우리 또래(기성세대)의 어른들로 인해 젊은이가 죽어간다"고 대답한다.




본문에서 '문명인 답게' 열흘 중 일곱날을 싸우고 나머지 기간에는 향연과 장례를 치른다는 부분이 있다. 오로지 명예만을 따지며 무모한 전쟁을 벌이고, 딸을 인신공양하며 엄청난 인명 살상을 담보로 하는 전쟁을 벌이는 이들이 '문명인'인가? 그리고 자존심을 내세워 부하들이, 동료들이 죽든 말든 기싸움을 벌이는 두 지휘관의 어리석음은 뒤늦은 후회에도 회복할 길이 없다. 그나마 지난한 세월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은 헥토르다. 그는 오로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명예든 부든 영광이든 그 어떤 명분도 가족을 앞서지 않는 사람.




국가야말로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발명품이라고 말하는 케이론이 어느 나라 출신이건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느냐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아닌 자도 인간의 가치를 알고 있건만, 정작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아들과 손주를 모두 잃은 테티스의 회한이 유독 와닿는 것은, 아비를 능가하는 아들을 '낳는' 것이 죄악이라는 이유로 제우스는 테티스를 인간에게 주었고 테티스는 여신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남신은 '낳는다'는 의미를 물리적인 행위에 국한했기에 여신(여자)를 물건을 건네듯 인간에게 줄 수 있었다. 남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야망을 이루려고 했던 테티스의 회한은 자손을 잃은 상실감과 더불어 끝없이 한계에 부딪쳐야했던 절망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모진 결단을 지켜만 봤다면, 그대로 그리스군이 패하고 철수했다면,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살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두 사람은 전쟁 이전처럼 행복할 수 있었을까? 설사 트로이아 함락 후에 두 사람이 살아있었더라도 예전과 같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가 파트로클로스를 화자로 선택한 이유를 독자는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깨닫게 된다. 그의 진가는 소설이 진행할수록 발휘되는데, 정점은 브리세이스를 구하는 장면이다. 친구의 진정한 명예와 또다른 친구의 안전을 동시에 이루는 파트로클로스의 가치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신을 존중하지만 인간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성별과 국적을 초월한 인간을 향한 연민.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이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세지가 아닐까.






#아킬레우스의노래 #매들린밀러 #이봄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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