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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Feb 05. 2022

달과 불

체사레 파베세



166.

배에서 내려 전쟁으로 파괴된 제노바의 집들 한가운데서 내가 처음으로 되뇌었던 말은, 모든 집과 모든 마당, 모든 테라스는 누군가에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었고, 물질적 피해나 세상을 떠난 사람들보다는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것들이, 살아온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기억을 떠올려 주는 것들이 더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비르질리아와 파드리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하고, 비르질리아가 죽은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모라 농장의 하인으로 가게 된 안귈라는 스무 살 무렵 농장에서 도망쳐 미국으로 이주해 자수성가한 후 마흔 살이 되어 보름 동안 보낼 계획으로 고향 토스테파노벨보에 돌아온다. 그를 맞이하는 건 그 시절 친구였던 누토 뿐이다. 


일평생 토스테파노벨보를 떠나지 않았던 누토는 과거 저돌적이고 유능해 항상 친구들에게 조언하고 열정적이던 누토는 과묵해졌다. 스무 해를 함께 했던 다른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고향. 안귈라가 떠난 20여 년 동안 무슨일이 벌어졌던 걸까?









비르질리아 가족과 함께 살았던 가미넬라 언덕의 옛집에서 앙상한 절름발이 소년 친토를 처음 마주하고, 그 아이에게서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안귈라가 그랬던 것처럼 친토 역시 가미넬라 언덕이 소년이 아는 세상의 전부일 것이다. 그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 안귈라에게 누토는 친토에게 불행해질 욕망을 불어넣지 말라고 한다. 안귈라는 소년에게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려줘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싶다. 고향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름발이로 일생을 마치게 하고 싶지 않은 안귈라와 지금 있는 곳의 세상을 바꿔 살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누토. 떠날 것이냐, 혹은 현실을 바꿀 것이냐.  



안귈라가 고향에 돌아온 시점은 1949년이지만, 주로 서술되는 시기는 전쟁 전후와 이탈리아 내전 당시를 그리고 있다. 공간적 배경인 토스테파노벨보가 작가의 실제 고향인 것처럼 소설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다분하다. 안귈라는 스무 살에 미국으로 가 우유배달원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자문하며, 고향을 그리워한다. 안귈라가 회상하는 유년 시절은 비록 가난하고 차별받고 고단했음에도 애틋하게 그려지는데, 소설 곳곳에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애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안귈라와 누토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안귈라가 전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묻는 사람이라면, 누토는 이미 벌어진 일은 운명이라 여기며 세상사를 이해하고 세상이 잘못되었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는 사람이다. 안귈라가 자기가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주를 선택했다면, 누토는 고향에 남아 매순간의 선택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안귈라가 달을 믿지 않는다면, 누토는 달을 믿는다.  



안귈라가 토스테파노벨보에서 살았던 시절의 사람들은 죽었거나 처지가 달라졌다. 일평생을 벨보 강 골짜기를 떠난 적 없이 가난한 소작농으로 살면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전쟁터에서 아들들도 전사하자 피폐해져 분노만 남은 늙은 발리노, 안귈라처럼 성공을 꿈꾸고 떠났으나 실패하고 돌아온 기사, 전쟁이 일어났고 나라를 구하고자 스스로 총을 들었던 이들과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순진하게 이용당한 이들이 한순간에 스파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시간들.  



같은 고향이지만 더 이상 안귈라가 알던 고향이 아니다. 그대로 인 것 같으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안귈라의 금의환향을 환대해줄 사람은 친구 누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더 컸고, 떠나고 싶다는 욕망보다 번듯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던 안귈라. 이방인 삶을 살면서 그토록 꿈꿔왔던 그리운 얼굴들과 마주하며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욕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자라고 흘러가고 죽는데, 강과 들판과 언덕과 나무는 그대로다. 



어디에도 정서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사생아로 태어나 사생아의 삶을 살면서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그곳을 다시 떠나야 하는 안귈라와 내전으로 인해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오직 살아남아야만 했던 그들 중 누구의 삶이 더 살만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소설에서 달과 불이 상징하는 바는, 그럼에도 희망적이다. 소멸과 동시에 소생을 말하는 불, 존재하는 모두를 위해,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준비하는 시간에 뜨는 달.  



절름발이 소년이 세상에 나와 뭘 할 수 있겠냐는 누토의 질문이, 안귈라에게는 사생아가 세상에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냐는 말로 들리지 않았을까? 안귈라가 사생아이자 가족이 없는 어린 하인으로, 결핍으로 점철된 자신의 유년시절을 딛고 살아남은 것처럼 친토도 잿더미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희망이 희망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안귈라에게 뿌리와 정체성이 되리라. 





#달과불 #체사레파베세 #문학동네 #이탈리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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