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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Jan 11. 2022

노변의 피크닉

아르카디 스투르가츠키, 보르스 스투르가츠키


 


소설은 '방문자'라고 불리는 외계 생명체가 다녀간 이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들이 다녀간 지역은 '구역'이라고 불리며 각 구역에는 국제외계문명연구소 지부가 설치되어 있다. 소설의 배경은 가상의 도시 하몬트이고 주인공 레드릭 슈하트의 고향이다. 연구소 하몬트 지부 연구원이자 스토커로서 이중 생활을 하는 레드릭의 1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역'은 역병지구, 모기지옥, 제1소경지구, 고기분쇄기 등 명칭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한 위험천만한 일로 가득하다. 스토커는 접근 금지 지역인 구역에 잠입하여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물체를 가져와 작물로 팔아넘기는 자들이다. 구역에 빌붙어 개인의 이익을 노리는 자들은 스토커들 뿐만이 아니다. 도살자로 불리는 이들은 외과의사로서 구역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을 접하고 여러 가지 노획물을 챙겨 자기 의술에 적용한다. 불구가 된 스토커를 대상으로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질병, 기형 인간의 신체 손상 등을 연구해 의료 지식을 챙기며, 명의라는 명예와 돈을 동시에 챙긴다. 이처럼 '구역'은 어떤 이에게는 생사를 건 생계 수단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명예의 수단이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탐욕의 수단이다. 



본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되기 전 필먼 박사의 인터뷰 내용이 먼저 등장한다. 인터뷰어가 지난 13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발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방문'이라는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하는 필먼 박사. 방문자의 정체나 방문 목적, 그리고 방문 이후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으며, 인류가 우주의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어쩌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인간의 고독을 기저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몬트는 '방문' 지역으로서 이민국은 하몬트 지역 사람들이 모두 떠나기를 바란다. 하몬트에서의 삶은 고되다. 권력은 군사 기관에 있고, 시설도 안 좋고, 옆에 '구역'이 있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심지어 조만간 대규모 건설공사가 시작되어 조만간 구역을 둘러싸고 벽을 세워 고립될 처지에 놓인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외부인들이 유입되는데 대부분 자극적인 모험과 일확천금, 특별한 종교를 찾아온 젊은이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한두 달 안에 절망을 안고 떠나고, 다른 일부는 스토커가 되어 짧은 시간 안에 죽으며 또 다른 일부는 연구소에 취직하거나 무직자로 방황한다. 하몬트는 넘을 수 없는 통제선들, 50킬로미터에 이르는 황무지, 연구자와 군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도시가 되어간다.



소설의 세 번째 장에는 필먼 박사와 누넌의 대화 장면이 있는데, 필먼 박사는 이성이 비합리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능력이며 아직 완성되지 못한 복잡한 본능이라고 말하면서 '이성'을 다른 시각으로 정의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가장 큰 차이인 '이성'의 우월함을 반대로 여기고 있는 것. 인간은 스스로를 우주 생명체 중 가장 우위에 놓고 오만을 부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방문자'들의 흔적에 갈팡질팡하고 있음을 비꼬고 있다.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인간사에 개입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자기들의 이익으로 환원시켜 악용한 것은 인간이다. 애초에 그 물질 혹은 물체들을 외계 생명체는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필먼 박사는 외계 생명체가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전제의 가설을 통해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다녀간 것은 우주의 노변에서 열린 피크닉에 불과하고 '구역'은 피크닉을 즐기고 간 흔적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더불어 인간이 위대한 까닭에 대해 푸시킨의 시를 빌어 인간은 자신을 보전했고 앞으로도 보전할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작가는 누넌의 입을 통해 필먼 박사를 빗대어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현상에 지식인(과학자)들의 책임 의식, 더 나아가 타인을 향한 대다수의 방임을 지적한다.  



한 예로 레드릭의 아버지와 딸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났는데, 허몬트 밖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우리 역시 그동안 역사 속에서 혹은 과학 기술의 이기에 의해 피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고통을 굳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차라리 누넌처럼 술에 취해버리는 것을 선택하고 만다. 그리고 누넌과 필머 박사가 한가롭게 토론을 벌이는 그 시각에도 오도가도 못한 채 피해를 고스란히 안는 것은 하몬트에 갇힌 사람들이다. 



"피크닉을 다른 데서 열 수는 없었나."라는 누넌의 독백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위기와 고난은 형태와 경중을 달리할 뿐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고민해야하는 것은 그 이후인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초반에 내비쳤던 인간의 이성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금빛 구체를 획득해 딸을 치료하고자 하는 레드릭은 아서를 버브리지에 대한 인질 삼아 데려왔건만 목숨 걸고 그를 구해준다. 레드릭은 자신을 절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선함을 선택한다. 비록 평생을 시체 사이를 헤짚고 다니더라도. 역자의 주에서 '사람은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다(p328)'는 레드릭의 말에서 '생각'은 이성이 아닌 사랑의 차원이라고 썼는데, 본능적으로 선을 선택해 온 레드릭의 행동에서 일관된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은 어떤 일을 하든 언제나 자기 자신이고 싶어한다는 작가의 말에서 그들이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를 인용하는데, 나는 그의 단편 <테르미누스>가 떠올랐다. 외계 생명체들은 그저 다녀간 것 뿐인데, 인간 스스로 재앙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지하는. 


SF소설이라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이성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사랑(이타심)이며, 인간의 본성은 선의에 있음을 기억해야겠다는 새삼스런 생각들이 레드릭의 건조한 마음과 엮여 여운을 남긴다. 출간된 시기가 냉전 시대였던 만큼 소설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에서 정치적, 이념적, 종교적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공짜로 드려요!'가 왜 이렇게 씁쓸하게 전해지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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