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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Jan 08. 2022

사물들

조르주 페렉




일단 이 소설은 첫 페이지부터 흥미롭다. 집안 내부 구조부터 벽, 바닥, 카펫, 가구 등 색과 모양까지 상당히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이 내용이 여섯 페이지 이상을 차지한다. 워낙 세밀하게 쓰여있어서 글을 따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느낌까지 말이다. 


이렇게 묘사한 집은 이제 막 학생 신분을 벗어난 제롬과 실비, 그들의 로망일 뿐이다. 현실은 35제곱미터 아파트의 턱없이 비좁은 공간이며 원하는대로 공사를 하고 싶지만 그만큼의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무한한 욕망만 있을 뿐이다. 넓은 집, 서재, 거실, 주방, 욕실, 그곳을 채워 줄 수많은 장식품과 가구, 그들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 예술품과 책, 그리고 가방과 양복을 비롯한 사치품. 그들은 세상의 모든 물건들을 소유하고 싶어했고,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소유의 기호들을 늘려갔다. 이는 단순한 사물들의 나열도 아니고, 사회초년생이 소망하는 장미빛 미래 설계에 그치지 않는다. 늘 현재진형행인 현대인의 부를 향한 욕망이고, 행복의 기준이다.   


독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셀 수 없이 수많은ㅡ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ㅡ사물들의 나열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실질적인 행복의 형태다. 영화, 산책, 쇼윈도, 쇼핑, 패션, 가방, 여행, 리조트, 레스토랑, 스테이크, 포도주, 잔이 부딪치는 소리 등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의 삶은 우리를 유혹한다. 침대 한 편에 소설을 쌓아두고 뒹굴거리며 모닝 커피를 즐기는 느긋한 자유로움은 광고 영상에서나 가능한 환상에 불구하다. 현실은 빠듯한 주거비와 생활비, 실직, 불완전한 고용, 승진 누락 등 점점 더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이다.  









작가는 드러나지 않는 내재한 진정한 즐거움의 부재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富를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 가고 있는 세태를 꼬집는다. 벌어들인 돈은 새로운 필요를 부추기고,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산 덕에 스스로의 가치관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으며 자신을 둘러싼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렸기에 늘 무일푼일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을 지적한다.  


야박하다 느껴질만큼 현실적이고 직절적인 이야기. 어쩜 이렇게 한 번 쯤 생각해 봤을 법한 얘기들을 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떼돈을 벌 수 있으며, 거액의 유산을 남겨줄 일가친적은 없는지, 로또 혹은 경마? 뭘하면 돈이 넝쿨째 굴러들어올까... 등등.  




시간이 흐르면서 개척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안정적인 서열 사회 속으로 합류해 들어가 갈망했던 환상의 세계에 안착해가는 친구들을 보면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혹은 적응을 거부하는 자신이 잘못된 건 아닐까 두려워진다. 도달하지 못하는 환상과 욕망에서 탈출하기 위해 튀니지로 떠나는 제롬과 실비. 그들의 탈출은 욕망으로부터인가, 아니면 나아지지 않는 가난으로부터인가. 그러나 제롬과 실비는 튀니지 스팍스에서의 다채롭고 화려한 삶에 만족할 수 없다. 스팍스는 피식민국의 시골에 불과했으니까. 그들은 시골뜨기이자 망명자가 되어버린 자신들이 싫다.  


제롬과 실비을 따라가보면 오늘보다는 내일 더 부자가 되고 싶은,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20대에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고, 도망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세상의 흐름에 맞춰 '남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책을 읽다보면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얘기하는 듯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 시스템을 겨냥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다. 모든 매체마다 온갖 물건들을 광고하고, 거리의 쇼윈도에서는 소유하는 물건이 당신의 계급이라고 유혹하는데 어느 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어느 누가 부자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몇 년 전 후배 왈 "언니, 나는 죽기 전에 옷 살 때 가격표 안 보고 사는 게 소원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에서 검소의 미덕을 개인에게만 강요하는 건 불합리하다. 더구나 어린 아이일 때에는 욕망을 경쟁력으로 포장해 칭찬하면서, 어른들의 바람대로 욕망덩이로 성장해 어른이 된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롬과 실비는 과거 나의 모습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시각 책상 앞에서 어딘가에 제출할 이력서 혹은 사업계획서를 쓰고 있는 내 주변의 청춘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의 청춘들은 부를 향한 욕망은 고사하고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생生의 신분에 갇혀있다. 어쩌면 21세기 청춘들에게는 제롬과 실비가 갖는 환상조차 꿈같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나는, 나의 사회 초년생 시절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 역시 제롬과 실비처럼 막연한 환상이 있었고, 그들처럼 현실의 벽에 부딪쳤으며, 끊임없이 탈출구를 찾아다녔다. 이 소설은 물질에 대한 욕망이 아닌 행복에 대한 집착이라고 읽혀진다. 우리는 왜 행복해지려고 하는가. 왜 꼭 행복해져야만 하는가. 나는 이제 행복이 꼭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사물들 #조르주페렉 #펭귄클래식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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