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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Mar 17. 2022

죽은 등산가의 호텔

스트루가츠키 형제


오컬트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SF였죠. 

p234



4년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동료 즈구트의 추천으로 혼자 '죽은 등산가의 호텔'을 찾은 경위 페테르 글렙스키. 주인 알레크는 페테르에게 6년 전 조난 사고를 당해 사망한 등산가의 방을 당시 그대로 보존한 방을 보여준다. 호텔에는 페테르 외에도 여종업원 카이사를 비롯해 거부 모제스 가족, 물리학자 시모네, 최면술사 듀 바른스토크르와 그의 조카 브륜, 스키를 잘 타는 거구의 올라프, 요양을 목적으로 한 결핵환자 힌쿠스 등 투숙객이 머물고 있다.


글렙스키는 투숙객이 모두 모인 첫 식사 자리에서 최근 호텔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젖은 발로 걸은 듯한 축축한 복도, 사용한 적 없는 수건이 젖어있는가 하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의 침대에 누군가가 누워 있었던 흔적,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작동되는 샤워기와 김이 서린 실내,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죽은 등산가'의 방수 점퍼 등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글렙스키는 이 모든 상황이 선을 넘은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느닷없이 눈사태가 발생하고 교통과 통신이 모두 끊긴 상황이 되어 호텔은 그야말로 완벽하게 고립된다. 그리고 한밤중에 도착하자마자 실신한 한 남자. 알레크는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말해 놓은 힌쿠스의 손님이라고 여겼는데 이 남자는 엉뚱하게도 올라프를 찾는다. 거기다 힌쿠스는 사라지고, 낯선 손님이 찾는 올라프는 자신의 방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일이 이쯤되자 페테르는 경찰로서 방관만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4년만에 맞은 휴가다운 휴가는 이미 물 건너 갔다.








부푼 기대를 안고 펼친 소설은 의외였다.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소설은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와 엘러리 퀸의 소설을 읽는 듯한 정통 추리소설의 형식과 고딕 소설의 느낌까지 가미된, SF적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소설이었다. 만약 이 소설이 추리소설을 표방했다면 한마디로 '망'이다. 마지막에 범죄자가 생뚱맞게 외계인이라면 어느 작가가 공들여 추리소설을 쓰겠는가. 그러나 이 작품은 진행되는 내내 결말의 여부와 상관없이 추리소설의 묘미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형이라고 회자되는 밀실 트릭을 비롯해서 촘촘한 시간 분배와 독자를 홀릴만한 밑밥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캐릭터까지, 다만 70여쪽을 남겨두고 결말이 예상되는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재미는 충분히 차고 넘친다.



일단 개인적으로 공감했던 부분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현재 인간에게 가장 큰 재앙은 고독과 소외라지만, 때로는 고독과 소외가 꼭 필요할 때도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집을 산 후 3년째 스키를 타지 못했다고 불평하며 노후를 위해 집을 장만한 것을 후회하고, 노후를 위해 평생 일을 해야한다는 아이러니를 곱씹으며 스키를 타고 순간을 기뻐하는 모습에서 우리가 한 번쯤 가졌을 법한 생각이라 웃음이 났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을 몇 가지 꼽아보자면, 외계인 바알세불이 인간을 죽이면 자기의 능력이 사라져 인간을 죽일 수 없다는 설정이다. 그러면서 바알세불이 페테르에게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을 죽일 수도 없고, 설득되지도 않는 인간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인간과 똑같아 질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달리 방법이 없었소. 그 로봇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거의 똑같이 복제한 거라오.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p344)"




사건의 모든 내막을 알게 된 페테르의 딜레마는 범죄가 벌어진만큼 법에 따라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그들을 구금해야하는 자신의 직업적 책임과 그들이 지구인이 아니라면 올라프의 사망은 살인 사건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없는 외계인은 죽어가고 있고, 그들의 목적은 오직 떠나는 것 뿐이라 데에 있다. 이는 곧 믿음의 문제였다.


외계인을 이용했던 암흑가 조직 '챔피온', 그들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모네와 알레크의 대비, 그리고 두 집단의 중간쯤에 어중간하게 서 있는 형상인 페테르. 이 설정에서 눈여겨 볼 만한 것은 시모네와 알레크가 바알세불 일행에게 가방을 돌려주기 위해 힘으로 페테르를 제압하자 페테르는 오히려 안도감을 갖는다. 갈피를 못잡아 갈등하던 순간, 책임의 소재가 더이상 자신이 아니라는 안도감은 살면서 우리가 수시로 맞닥뜨리는 부분이 아닐까싶다.


관찰자로서 지구에 온 바알세불. 그가 본 지구인은 어떤 존재였을까. 페테르는 비극적인 결과를 얻은 이후 살면서 그 당시 자신이 옳았는지 수시로 자문한다. "내가 옳았을까?" 어느 누가 늘 옳은 선택만 할 것이며, 모든 이가 만족할만한 옳은 선택이 있기는 한건지. 그래도 우리가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의 '양심' 때문이다. 페테르가 오랜 세월 보이지 않게 고통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페테르는 이 호텔에 너무 많은 미치광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알콜, 약물, 물질, 성, 폭력 등의) 중독자, 살인자, 이기주의자, 사디스트... . 부디 바알세불이 지구에서 이 미치광이들만 본 건 아니기를.





#죽은등산가의호텔

#스트루가츠키

#현대문학

#SF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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