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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Oct 26. 2022

청부 살인자의 성모

페르난도 바예호


그 커다란 풍등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무도 몰라. (...) 그 종이는 얇고 주름 잡혀 있어서 쉽게 불붙거든. 조그만 양초의 불꽃만으로도 충분해. 하나의 불꽃이 나중에 콜롬비아를 불태우고 '그들'을 불태우는 데 충분했던 것처럼. 그 불꽃, 이제는 아무도 그것이 어디서 튄 것인지 몰라.  
(p9)




한동안 고국을 떠나 있던 문법학자 페르난도는 수십 년이 흘러 돌아오고, 유년 시절의 고향을 찾아가지만 메데인은 그때와는 다르게 폐허가 되어 있었다. 친구 호세 안토니오 바스케스의 아파트에서 청부 살인과 매춘으로 살아가는 청년 알렉시스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순례를 떠난다.  







50년이 넘도록 이어진 콜롬비아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피폐해진 것도 모자라 게릴라, 민병대 할 것 없이 깊이 연관되어 있던 마약 카르텔이 군과 대치한 후 뿔뿔이 흩어진 조직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폭력 조직을 만들고 영역 싸움을 하며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됨으로써 점점 더 분열되고 혼란스러워지는 사회의 한복판에 있다.  


시민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문 밖을 나서야하고, 청년들은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장소를 불문해 총을 난사한다. 도둑들이 들끓으며, 마약 밀매 운반을 해서 번 돈으로 택시를 사들인 기사는 한순간에 약탈자로 돌변한다. 일단 거리에 서면 총에 맞지 않기를 기도해야하고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면 다행인, 그래서 전쟁터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콜롬비아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아비규환 상태. 총을 소지한 자들의 총구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콜롬비아인들은 죽기 위해 태어났다. 


인권 유린 쯤이야 별일 아니고, 치안이나 사법 체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치권은 국민이 마약에 찌들든 죽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살기 위한 살인은 복수가 되어 마치 먹이사슬처럼 순환하고, 사람들은 온정한 정신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만성적으로 술과 약에 취해 사는 것이 더 속편할 지경이다. 


높은 대출 금리, 높은 세금, 바닥치는 경제와 농업.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회. 경찰은 오히려 체포한 범죄자의 돈을 갈취하고, 시민들의 돈을 부당하게 강탈하며, 언론은 권력자의 앵무새이자 남의 죽음으로 먹고사는 독수리일 뿐이다. 






페르난도는 묻는다. 신부 앞에 고해성사를 해야하는 이는 순수하고 진실한 젊은 청부 살인자인가, 아니면 살인을 명령한 사람인가? 그러면서 알렉시스가 사람을 죽이는 데에 있어 미움이 없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스스로 답한다. 그러나 화자의 이러한 답변은 소설이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잃는다. 불쾌하다고, 거슬린다고, 화가 난다고, 나이고하 상관없이, 고작 여덟 살 아이에게까지 거리낌없이, 사람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알렉시스에게 순수와 진실이 남아 있을까. 작가는 이를 통해 소외계층의 가난한 청년들이 범죄자가 되도록 만든 정치와 정권을 비판하며, 정작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 권력자와 정부야말로 도둑이자 살인자임을 비틀어 꼬집는다. 


그렇다면 학자인 페르난도는 알렉시스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을 왜 방관만 하는 걸까. 아마도 콜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와 부당함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납득하기 때문이리라.  


청부 살인자들은 세 개의 스카풀라를 착용한다. 하나는 일을 맡게 해달라고, 다른 하나는 총알이 목표물을 빗나가지 않게 해달라고, 또 다른 하나는 돈을 받게 해달라는 것. 이 대목도 제법 의미심장하게 전해진다. 이중에서 총에 맞지 않게 해달라는 바람이 없다. 즉 애초에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며 언제라도 죽을수 있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일테다. 태어난 것 자체가 원죄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삶을 지속시키는 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는 것이라고는 오직 살인과 매춘 뿐인 젊은 청부 살인자의 피를 닦아줄 성모는 어디에 있는가.


잔혹한 혼란스러움은 한때 오지 중의 오지였고 성지라고 여겼던 사바네타조차 비켜가지 못했다.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하고, 복수의 사슬을 한 단계만 지나도 왜 죽고 죽이는지 알 수 없는, 모든 게 불확실한 시대에서 산다는 것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두 청년을 먼저 떠나보낸 페르난도는 홀로 순례를 계속한다. 부디 죽음이 어서 찾아와 주기를 기대하며. 그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욕과 폭력과 살인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이 소설이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는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죽어야 할 이유를 아는 죽음도, 이유를 모르는 죽음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하는 이들의 고통도, 누가 기억해줄 수 있을까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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