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Unsplash의Lerone Pieters
그는 SRT를 타고 지제역에 내렸다. 해를 넘기기 전 개통한 이 열차 덕분에 2개의 큰 행정구역을 아주 빠르게 지나올 수 있었다. 내가 광주에 방문할 때는 무궁화 호를 타거나 광역버스를 타곤 했는데, 그에 비하면 아주 효율적인 교통수단인 셈이다. 얼마 전 나눴던 대화를 끝맺기 위한 만남이었다. 입김이 유난히 희미해진 어느 날이었다.
어딘가 모를 집착을 보이던 그가 더 이상 편치 않게 느껴진 건 연애를 시작하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일을 하던 친구를 벼르고 벼르다 만나러 간 날이었다. 친구와의 술자리를 즐겨야 할 시간에 통화를 하느라 밖을 서성이어야만 했던 것과, "누구도 연인의 여행을 그렇게 허락하지 않아"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던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헤어짐이라는 선택을 앞당길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유 있는 죄책감에 솔직한 말을 성대 아래 깊이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 회사는 신입사원을 전환형 인턴으로 채용한다. 대부분의 인턴사원들은 3개월간의 평가를 거쳐 정직원으로 전환된다. 비율로 따지자면 95%는 전환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나머지 5%마저도 대부분 다른 회사에 채용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자진 하차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런 사유 없이 5%에 들게 되었는데, 이 일이 바로 내게 부채의식을 선물해 주었다. 인턴 평가 기간이 채 지나기 전에 관계를 시작한 것,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채의식이 전제된 관계는 건강할 리 없었다. 나는 그가 나에게 소비하는 시간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가 하루빨리 새로 취업자리를 알아보기를 바라왔다. 광주와 평택을 오가야 하는 물리적 거리를 채우기 위해 매일 길어지는 영상통화가 낭비처럼 느껴졌고, 유난히 불편한 티를 낼 때면 그는 여지없이 넘치는 감정으로 스스로의 바닥을 드러냈다. 아직도 어떤 논리구조에 의해서 생겨난 감정들 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잉된 감정은 그의 집착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고, 내 부채의식은 지난한 책임감으로 이어졌다. 그가 다시 취업에 성공하기 전까지 그에게 이별을 고하는 일이 마치 최소한의 양심을 상실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는 SRT를 타고 지제역에서 내렸다. 며칠 전 그에게 전한 '이별'을 이대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발을 이곳으로 이끈 이유다. 그는 마침내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꾹 참아왔던 말들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일요일 밤에 이러는 게 어디 있냐" 그의 첫 반응이었다. 일주일 내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 되었는지 그는 대뜸 열차에 몸을 실었노라는 메시지로 만남을 강요했다.
대합실에서 만난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 앞에 마주 섰다. 반가움에 언뜻 웃음을 보인 것도 같다. 통창에 볕이 가득 드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돈까스를 한입 베어 물며 그동안 느꼈던 감정을 가감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사랑이 아니었어" 그가 느낀 배신감이 떨리는 그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렇다, 이 관계는 빠르게 정리되었어야 하는 관계임이 분명했다. 소스가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남아있는 그의 돈까스가 식기도 전에 그는 자리를 비우고 일어났다.
그는 SRT를 타고 광주역에 내렸을 것이다. 해를 넘기기 전 개통한 이 열차 덕분에 아주 빠르게 그에게 던져진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곧 풀 내음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