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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우 Jan 30. 2023

아직도, 후회하지는 않아

사진출처 : Unsplash의 Nick Fewings


도망치듯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 시간에 어딜 가세요?" 하는 경비원의 물음에 "그만뒀습니다." 애써 웃으며 답을 건넸다. "이렇게 좋은 직장을요?" 그러게, 왜 나한테 이곳은 그리도 떠나고 싶은 곳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시작부터 어긋난다. 애써 구한 자취방에는 개미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고, 밤이면 무슨 일 인지 건물 전체가 울릴 정도의 소음이 들려왔다. 매일 맞는 출근길이 길고도 고단했다. 회사에 도착하고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하루를 온전히 사용해 버린 사람이 되곤 했다.


단 한 번도, 그저 현재 느끼고 있는 더러운 감정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적은 없었다. 덮어두고 마시면서 아픔을 해소하는 일은 멋있는 행동이 아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일이라며 평가절하하곤 했을지도. 입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고 살아왔다. 퇴근과 동시에 내일이 두려워진다. 이대로 또 아침을 맞아야 할 것만 같은 막막함에 바닥에 주저앉고 싶어 진다. 내가 움직임을 멈추면 시간도 더디게 흐르겠지. 보란 듯이 움직이는 구름에 야속함을 가득 담아 길을 꾹꾹 눌러 편의점으로 향한다. 손안에 들린 봉투에는 참이슬 한 병과 진라면 매운맛 한 개가 들어있다. 혼자 마시는 소주는 그렇게 매일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는 값싼 유희가 되었고,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게 되어 버렸다.


손끝에서 퍼지는 담배 냄새가 현기증을 일으킨다. 사무실의 차가운 공기에 챙겨 입었던 파카에서도 짙은 담배 향이 쏟아진다. 베란다에 걸어두고 페브리즈를 반통 뿌려본다. 제발 좀 지워졌으면. 목이 칼칼하다, 담배를 많이도 피워댔다. 내 자리는 복도 끝 맨 앞자리. 잡다한 일들이 앉아만 있어도 생기는 곳이며, 의연하게 대처하기를 기대받는 자리였다. 쌓이는 일에 도저히 몸을 의자에 구겨 넣고 있을 자신이 없어져 밖으로 나간다. 담배를 피운다는 건 훌륭한 핑곗거리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내뱉는다. 좀 나은 것 같은 착각에 이 시간만은 느긋하게 흐르기를. 치-익 담배가 타들어간다. 이제 얼마 안 남은 제 몸을 보이고는 서둘러 들어가라며 손끝을 뜨거움으로 간지럽힌다. 대책 없이 쌓이고 있을 일들을 떠올리며 바삐 발을 움직인다. 그렇게 열 번을 움직이면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한다. 비로소, 증식을 멈춘 덩어리들을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이내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밀어 넣는다.


토요일 밤부터 시작되는 한숨을 더 이상 참아낼 자신이 없어졌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철없는 신입사원의 응석 정도로 받아들인 관리자들은 맛있는 거 한두 번 사주면 마음을 돌리겠거니 하는 모양이었다. 입사하는 것만큼이나 퇴사도 어렵다. 그들을 설득할 핑계 아닌 핑계가 필요했다. "공부를 더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사람 한 명, 그것도 오만가지 잡일을 담당하고 편하게 굴릴 수 있는 직원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제법 성가신 일이 맞는 모양이다. 그렇게 많은 날 내쉬었던 나의 한숨이 드디어 관리자의 한숨이 되어 돌아왔다. 5개월이 지난 초여름이었다. 더 이상 발을 질질 끌지 않아도 되는 걸음으로 회사 앞 육교를 건넜다. 이리도 시원한 풍경이었나, 그날은 수서 IC 마저 정체 없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들려오는 동기들 소식에 흠칫 과거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5개월을 더 버텼으면 어땠을지 상상을 좀 해보기도 하지만 과거를 대단히 미화하거나 폄하하지는 않는다. "멍청한 놈" 그저, 퇴사 소식을 전해 들은 친구 아버지의 한마디로 아쉬움을 대신할 뿐. 아직도 도망친 걸 후회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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