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성 선수를 아시나요? #230820_롯데 vs. 키움
나의 고백을 2번이나 거절한 사람이 갑자기 친구로는 지내자고 한다면?
①고마워 친구로라도 지내게 해 줘서
②내 삶에서 사라져 줄래?
야구장에 출근해 첫 번째로 하는 일은 라인업 적기다. 자이언츠가 원정을 왔던 그 해 여름, 1번 타자부터 8번 타자까지는 이름만 보고도 등번호를 막힘없이 적어 내려 가다 9번 유격수에서 멈칫했다. 이름도 번호도 모두 낯설었기 때문이다. 자이언츠는 가을 야구에 갈 수도 말 수도 있는 그런 길목에 서 있었다. 유지가 아니라 반등하려면 변화가 필요했을 테고, 그해 영입한 유격수는 제 몫을 잘 해내진 않았다. 위기의 자이언츠는 한 선수에게 그 이름을 처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멋지게 잡았다. (1군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쳤다.) 두고두고 보관될 공이다. 뛰어난 선수로 성장한다면 두고두고 쓰일 장면이다. 그리고 나에겐 이 선수의 처음을 보았다고 두고두고 증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비록 진 경기였지만 얻은 것이 있다며 (3안타를 쳤고, 수비도 준수했다) 위로할 수 있는,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처음을 목도하다니. 이렇게 이 선수의 처음에 애틋해지고 만 것은 그가 대졸이고 또 육성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드래프트에 떨어졌었구나. 야구를 잘하긴 했는데 111등이었겠구나. (KBO 신인 드래프트에선 매해 1차 1라운드부터 11차 10라운드까지 총 110명의 신인이 지명된다.) 드래프트장에서 “ㅇㅇ ㅇㅇㅇㅇ 지명하겠습니다. ㅇㅇ고" (혹은 ㅇㅇ대) 자신의 소속 학교가 불리기라도 하면 그 뒤엔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몇 십 번은 바랐겠지. 그러나 끝내 듣지 못했을 거다.
마치 회사에 매년 공채가 있고, 계약직 수시 채용이 있는 것처럼 야구에도 트래프트를 통해 뽑히는 몇 차 몇 라운드라는 수식어가 붙는 쪽과 육성 선수라 불리며 세 자리 등번호를 달고 야구를 시작하는 쪽으로 나뉜다. 드래프트와 비드래프트의 차이는 구단이 얼마나 기다려주느냐, 그 시간의 차이에 있지 않을까 싶다. 성장할 시간을 부여받느냐, 시간 안에 증명해 내느냐. 희박한 가능성을, 적은 기대감을 가능성으로 보여줘야 하니, 마음이 조급할 테다. (육성 선수 중 일부는 5월에 정식 계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나는 호명되지 않음의 좌절감을 잘 아는 후자, 그러니까 계약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꿈꿔왔던 회사인데 내 처지를 생각하면 씁쓸함이 차오른다. 천천히 달아오르는 뚝배기 같은 신입이 아니라, 3분이면 끓어오르는 양은 냄비를 자처했다. 까맣게 타버려서 대체되어도 좋으니 뜨거운 자세로 일한다. 일을 통해 성장하기보단 소진되는 듯하고, 다음을 생각하면 밤이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111등을 응원한다. 이들의 응원한다는 건 곧 나를 일으키는 일과 같다. 한 때 야구에서 111등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 한 번은 1등이 되어주기를. 그렇게 87번이란 등번호가 자이언츠에서 잠시 반짝하고 사라지는 숫자가 아니라 오래도록 빛나길 바라는 여름이었다.
해피엔딩이면 좋겠건만 이번 이야기는 새드 엔딩이다. 이 선수는 새 시즌이 찾아오기 전 팀에서 방출당했다. (육성선수 신화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님을 체감했다.) 못 해서가 아니라 음주운전 때문. 그렇다고 여기서 111등 응원하기를 멈출 생각은 없다. 여전히 남은 111등, 버티고 있는 111등은 야구계에도 우리 곁에도 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