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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Nov 21. 2015

상식 상대성의 이론

설탕 없는 팥죽/ 콩국수에 대한 충격담

해질 무렵 쌀쌀한 날씨에 팥죽 생각이 났다. 집이었으면 엄마가 만들어줬을 텐데, 현재 나는 1인 가구이므로 홈메이드는 사치다. 검색을 했다. 옥**, 호** 등등 단팥죽 집은 많아도 팥죽은 잘 없다. 물론 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품목일 수 있다. 그러나 내게 팥죽은 그런 팥죽이 아니다. 

나의 팥죽은 오른쪽, 밀가루 면이 가득한 팥죽이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팥죽은 다 왼쪽, 새알이 동동 띄워진 팥죽이다. 내 팥죽이 팥죽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대학 입학 후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다. 찬 바람이 불던 어느 날 이모가 칼국수집에 데려갔다. 메뉴판에서 매우 기이한 메뉴를 보았다. "팥칼국수" 이건 대체 뭔가 했다. 머릿속으로 팥과 바지락과 호박, 당근, 양파가 어우러져있는 그림을 그렸다. 속으로 조금 웃었다. 서울 사람들은 팥으로 칼국수를 만들어먹는구나.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나는 꽤 충격받았다. "팥칼국수=팥죽"이란 걸 알게 됐다. 충격은 하나 더 있었다. 설탕이 없이 팥죽을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 봤다. 20년 동안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옆 테이블의 그 사람을 외계인 보듯 쳐다봤다. 

그 해 여름, 나는 같은 시선을 역으로 느꼈다. 친구들과 학교 앞에 콩국수를 먹으러 가서였다. 뽀얀 콩국수를 내어주던 아주머니는 소금을 주고선 사라졌다. 아주머니께 설탕을 달라 했다. 의아해하던 아주머니는 소금만큼 설탕을 주셨다. 또 설탕을 달라 했다. 이번엔 많이  달라했다. 여전히 소금 종지 하나 정도였다.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내 앞에 앉은 서울 친구의 시선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설탕을 넣느냐, 그렇게나 많이 넣느냐 물었다. 잠시 외계인이 된 것 같았다. 20년 평생을 팥죽과 콩국수에 설탕을 듬뿍 넣고 먹어온 나는 설탕을 넣어 먹는 사람들밖에 만나보지 못했고, 그렇게 먹는 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당분이 혓바닥에 닿지도 않을만치의 설탕을 주던 아주머니나 서울 토박이였던 친구의 시선에 조금 위축됐다. 롯데월드를 소풍으로 갔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훨씬 큰 괴리감이 느껴졌다.


다들 그리 먹으니 왠지 나도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은 팥칼국수를 주문하고 설탕이 없이 먹었다. 콩국수도 소금간만으로 먹었다. 참 맛이 없었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서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먹는단 말인가.   

나는 짜증 섞인 투로 왜?!를 내뱉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Why 보다는 How dare에 가까운 탄식이었다. 똑같이 "왜 그럴까"라는 문장을 발음하더라도 '그'에 강세를 주느냐, '까'에 강세를 주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강세를 옮겨가며 발음하는 모나리자 게임을 떠올리며 한번 소리 내어 발음해보시라. 순전히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까'에 초점을 두면 "왜 그럴까? (궁금해)"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그'에 강세를 주면 "왜 그럴까?! (대체)" 에 가깝다.  '그'에 강세를 주는 순간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된다. 이것이 상대를 비상식적이라 여기게 되는 순간이다.


상식. 국어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으로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을 포함" 


나는 이 문장에서 '보통', '일반적'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보통'이나 '일반적'이라는 말 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것도 없다. 누구에게 보통이고 누구에게 일반적인가. 그렇다면 그 일반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상식인가. 참 폭력적인 정의라 생각했다. 편 가르기다. 상식의 틀에서 접근하게 되는 순간, 나는 보통이 되거나 특수가 된다. 고향집에서 팥죽으로 서울의 '팥칼국수'를, 설탕을 듬뿍 넣어 먹었던 것은 나에겐 상식이었다. 콩국수에 소금 한 꼬집, 설탕 네 큰 술을 넣어 먹는 것도 나에겐 상식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오니 그게 비상식이다. 나의 상식이 너의 비상식, 너의 상식이 나에겐 비상식. 누가 보통의 일원이고 누가 일반의 일원인가. 

비단 팥죽과 팥칼국수, 설탕과 무설탕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속으로 혹은 동료들과 직장상사를 욕하며 "왜 '그'럴까?!"를 내뱉었다. 멀쩡히 한 가정을 꾸리고 원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지만, 업무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상식'을 운운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이 싫었다. 그/그녀의 생각에 따르지 않으면 '비상식'이 되고 만다. 그/그녀에게 나는 참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보통이 아닌 사람이 됐다.


이런 생각이 찾을 때 나는 컴퓨터 폴더를 열어 예전 사진을 다시 본다. 특히 5년 전 해외 생활은 다양한 상식의 세계의 존재를 알아갔던 시간이었다. 모두가 같은 시험을 보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가서, 적당한 나이에 적당한 직업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적절한 시기 안에 아이를 가져야 하며, 그에 맞는 아파트 평수, 차종, 차림새 등등 상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 게 한민족 한국사회다. 그 사회에서만 자라 온 나였다. 그러나 그곳은 달랐다. 다양한 국적, 다양한 인종,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문화의 친구들과 지내다 보면 '보통', '일반' 따위는 별 의미가 없는 단어로 느껴졌다. 뭐라도 하나 그룹핑이 된다면 선긋기, 편 가르기가 가능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다 달랐다. 서로가 다르게 생겼으니 누가 예쁘고 못생겼는지도 비교할 수도 없다. 서로 출신국이 다르다 보니 누구는 반팔 입을 때 누구는 패딩을 입는다. 패션을 비교할 수도 없다. 누구 얼굴이 크고 작은지, 누구 코가 높고 낮은지, 그 세계에선 보통 크기, 보통 높이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상식이다. 그 어떤 상식도 유일할 수는 없다. 상식은 참으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때문에 비상식이란 없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이었다.


요 며칠, 몇 살 아래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비상식'적인 삶을 살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느낀다. 주변 친구들이 하는 대로 못했을 때의 열등감,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걱정, 자기만의 길을 찾기에 부족한 용기에 대한 아쉬움 등등.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이 모두가 상식의 틀에서 벗어날까 망설이는 것이다. 다시 팥죽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팥칼국수를 먹던, 팥죽을 먹던 누구 하나도 비상식적인 것은 아니다. 다들 자신의 방식대로 먹고 산다. 같은 맥락에서 '비상식'적인 삶에 대한 걱정은 딱히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다 서로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있다. 자신이 누군가를 '비상식'의 영역으로 보내버리지 않는 한, 자신의 '상식'적인 삶은 누구나 영위할 수 있다. 눈치 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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