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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Nov 26. 2015

다시 블랙프라이데이

퇴사 후, 뺄셈이 '먼저' 필요한 시간


블랙프라이데이가 왔다 (이하 블프). 쇼핑을 즐기진 않지만 직구는 종종 하는 편이다. 백화점 동일 제품의 가격과 비교하면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다. 올 해의 그 날을 앞두고 나는 작년 블프 구매 목록을 다시 살펴봤다. 당황했다. 구매 목록에는 내가 일 년 동안 샀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물건이 있었다.


왼쪽 그릇 더미 사이에 깔려있던 오른쪽 맨 앞 접시

갖고 싶던 브랜드의 접시였다. 큰 접시들 사이에 끼어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던 녀석들이다. 받을 때는 분명 설레는 마음으로 깨끗이 닦아 넣어두었을 것이다. 왜 몰랐을까. 어떻게 이토록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사실 이런 일은 종종 있다. 특히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면 이런 물건이 있었나 싶은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 선물 받았던 향수, 여행 가서 예뻐 보여 샀던 스카프, 광고에 혹해서 산 믹서기, 쥬서기, 채칼 등등. 없이 살아도 불편하지 않았을 것임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정리하기 귀찮게 왜 샀을까 후회한다.



사회 초년생들에게 선배들이 기대하는 것 중 하나가 꼼꼼한 일처리다. 필요한 일을 제 시간에 해두는 것이 신입사원에게는 결과물의 퀄리티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신입의 다이어리에는 매일의 할 일, 선배의 지시가 빼곡히 적혀있다. 일부 바람직한 신입은 메모 내용에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한다. 한편 깔끔한 책상 정리는 정돈된 직원의 머릿속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의 한 상사는 사원들에게 '마치 내일 퇴사할 사람처럼 깔끔한 책상'을 강조했다. 책상을 보면 너희들의 생각이 보인다나.


메모하는 것 자체는 어쨌든 꽤 괜찮은 습관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이라고도 하지 않나. 한 달 전 퇴사 후 나는 "Non-직장인" 계의 신입이 된 셈이다. 성공한 Non-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메모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이 내용은 좀 다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보고 싶은 사람, 배우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


신입사원이 업무 파악을 위해 정리하듯, 나는 나 스스로를 파악하기 위해 메모했다. 꼼꼼히, 그리고 우선순위도 매겼다. 동시에 물리적인 거주공간인 나의 보금자리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옷장을 열어 안 입는 옷, 안 쓰는 액세서리, 안 신는 신발 등을 꺼내 분류했다. 엄청난 양이었다. 남은 물건들이 여유롭게 정리될 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옷장이 맘에 쏙 든다. 다른 공간들도 같은 방식으로 정리를 했다.

생각해보면 지난날의 나는 '더하기'만을 위해 노력해왔다. 학생 때는 늘 더 배우려고만 했고, 취업 후에는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애썼다. 더 많은 사람을 알아야 했고, 더 많은 분야의 지식을 쌓아야 했다. 옷도 더 많아야 했고, 가방도 더 많아야 했다. 맨날 입는 옷만 입고 출근할 수 없고, 한 달 내내 같은 가방을 드는 것도 안 될 말이었다. 화장품과 신발, 액세서리도 더 갖고 싶었다. 여권에 찍힌 도장도 많아야 했다. 심지어는 연애도 많은 사람과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에야 발견한 작년 블프 구매 접시 역시 나의 덧셈 인생의 산물이었다. 아무리 더해도 더하기가 고팠다.

오늘 접시 정리를 하면서, 삶에는 뺄셈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하기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덧셈만 해오던 사람은 뺄셈 앞에 매우 조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기 앞서 '꼭 빼야 할까', '왜 빼야 할까' 자문한다. 그 답을 얻는 것은 덧셈의 근거를 찾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삘셈은 덧셈처럼 쉽게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방을 예로 들어 보자. '왜 사야 하는가'. 캐주얼한 가방, 얌전한 가방, 파티용 가방, 시장가방, 운동용 가방, 도서관용 가방, 여행가방 등 사야 하는 이유는 수십 가지 즉석에서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왜 버려야 하는가'를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자주  안 쓰면 버려야 하나, 비싸게 샀는데도 유행이 지났으면 버려야 할까. 모든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고민의 끝에 그 답을 찾았을 때 뺄셈은 스스로의 가치관/목표/필요/욕구 등에 대해 덧셈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런저런 군더더기가 빠지고 나면 오롯한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모습에 걸맞은 물건들을 중심으로 공간을 정리하다 보면 훨씬 깔끔하고 마음에 드는 나의 공간이 탄생한다.


 KIP CORNETT   출처: http://teamcornett.com/about
 DAVID COOMER  출처: http://teamcornett.com/about


CHRISTY HILER  출처: http://teamcornett.com/about

미국 켄터키주의 광고회사 Cornett 홈페이지에 실린 직원 소개는 독특하다. 그들의 프로필이나 얼굴이 대신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찍은 사진으로 직원을 소개한다. "나를 대표할 수 있는 물건들은 무엇인가. 왜 그러한가." 새것들을 삶에 들여올 블랙프라이데이에 앞서 한 번쯤 생각해보자. 이들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를 걷어내면, 새로 들여올 물건들 역시 더욱 가치 있게 빛날 것이다.



고백.

브런치에 글을 적어보며 간결한 글쓰기의 어려움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글은 최대한 담백하게 쓰기 위해 줄이고 또 줄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아지고, 글은 계속 길어졌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을 쏟아내 나열했던 것이 왠지 일방적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번 글부터는 저도 글쓰기 시간에서 '뺄셈'을 우선시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보려 합니다.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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