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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홍철 Apr 28. 2024

고독 그리움 그리고 지울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윗글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입니다.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여러 글에서 인용되고 있지만, 특히 그의 묘비명은 많이 소개되어서 독자들도 많이 접했을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그 묘비를 보기 위해 지중해의 크레타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법정 스님도 그의 산문집 <텅 빈 충만>에 의하면, 이 책을 읽고 유럽 출장 기회에 카잔차키스가 살았던 크레타를 방문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조르바 (소설 속의 주인공이며 실존 인물)처럼 자유롭게 살다 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삶을 살았으며,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무엇을 원한다면 원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고, 두려워하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정신과 몸이 모두 구속되고 맙니다. 그러나 조르바처럼 원하는 것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면, 그야말로 가볍고 자유로운 삶이 됨에 틀림없습니다. 조르바는 “내 영혼을 처음으로 뒤흔든 것은 공포와 고통이 아니었고, 쾌락이나 장난도 아니었으며, 자유에 대한 열망이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슬프고 괴롭고 고독함을 극복하기 위해 자유를 더욱더 외치며 철저히 실천했던 것이 아닐까요.


  조르바는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이 순간에 느끼는 행복이라고 하면서, 포도주 한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 같은,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통해 행복을 느꼈습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마지막 모습을, “먼 산을 바라보다가 통곡하며 울다가 또 한바탕 미치듯이 웃으면서 죽음을 맞이하였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유, 자유, 자유를 외쳤지만, 조르바의 마지막 모습은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지 않았을까요?


  외로움과 고독은 어떻게 다른가요? 일반적으로 섞어서 쓰지만, 철학자들은 명확히 구분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고독 속에서 난, 나 자신과 함께 있는, ‘홀로’이다.” 즉 하나 속의 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 나는, 모든 타인에 의해 버려진, 그야말로 하나인 것입니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재인용)


  고독은 홀로 있다는 점에서 외로움과 같으나 능동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고, 외로움은 타인으로부터 소외된 공허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러나 고독은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오히려 정신적 힘이 되고 창조적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 현대인은 고독할까요? 문명과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자신과 타인의 이해관계에 깊은 골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예민하게 살고, 한시도 자기를 잊지 않고 자기 모습을 확인합니다. 항상 긴장하며 살게 되지요. 그래서 어느 분은 인간의 지성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쇠약해진다고 얘기했습니다. 겉으로는 세련되게 교제하지만, 주위에 믿을 사람이 없고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자의식의 과잉을 낳고 결국 긴장과 고독이 만들어지지요.


  지난주 칼럼에서 자유와 고독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존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자유가 가득할 때 그 대가로 쓸쓸함이 찾아오지요. 그래서 오래전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유를 동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고 자유로부터 도망쳐 ‘절대적인 것’에 속하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자유와 고독을 옆에 두고 싶지만, 부자유스러울 때 잘 보인다는 자유의 역설도 같이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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