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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홍철 Aug 05. 2024

자본과 노동의 상생



  자본과 노동은 경제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노사 관계라는 이름으로 항상 대립과 갈등이 있어왔지요. 노사 관계가 협력 지향적일 때는 어느 정도 착한 성장을 이루나 갈등 관계에서는 양적 성장을 했다 하더라도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득권 세력과 사회적 약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집단이 상생 관계에 있을 때는 그 사회가 더 안정적이지만 대립 관계일 때는 불신과 분노가 팽배한 사회가 되지요.


  어느 대기업에 고졸 여직원으로 입사하여 상무까지 승진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21대 국회에서 당시 여당으로 공천을 받아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분으로 알려졌지만 그분이 속한 정당의 정책은 대기업 출신이라는 그의 정체성과 맞지 않아 다소 잡음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과 가진 자를 악(惡)이라고 보는 우리의 인식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기업이 없으면 노동이 있을 수 없고, 노동자에게 분배되는 상당 부분의 정부 예산도 기업에서 충당하니까 기업이나 가진 자를 악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분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는 것이고, 또한 우리나라 상위 0.1퍼센트의 한 해 수익이 하위 26퍼센트 인구 소득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현실에 상당한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것도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초고소득층의 재산 형성이 부끄럼 없이 능력과 노력에 기인했다고 인정할 수도 있지만, 욕심을 내자면 그분들이 미국의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과 같이 공익사업에 더 많이 투자하고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사회적 약자들은 금전적인 보상만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따뜻한 시선을 더 원하는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연히 사회적 약자 편에 서야 하는 종교마저도 극히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정치화, 세속화되었다는 점입니다. 면죄부를 사야 구원을 받는다는 중세 시대의 가톨릭 교단의 극단적 타락이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었지요. 그러나 극히 일부 대형 개신교에는 자신이 탄생했던 이유를 망각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염홍철의 새마을인문학> 228쪽 참조)


  지난번 코로나19의 어려움을 겪을 때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소외당하던 음식점 종업원, 배달원, 돌봄 노동자 등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임금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이 우리에게는 필수적이고 절실한 사람들임을 다시 인식한 것입니다. 부자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양적 성장도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욱 좋은 성장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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