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하고 화목한 추석 명절을 보내셨는지요? 저는 쉬는 동안 한국 현대시의 ‘위대한 혁신가’로 알려진 김수영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시는 나의 닻이다’라는 말이 김수영 시인의 좌우명인지는 몰랐습니다. 그의 50주기에 후배 문인 21인이 <시는 나의 닻이다>라는 헌정 문집을 낸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시가 그의 삶을 잡아주고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제공하기 때문에 시를 닻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짐작이 됩니다. 닻처럼 시는 그의 존재를 고정시키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요.
닻은 선박이 바람이나 조류로 인해 표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선박을 수역 바닥에 고정하는 데 사용하는 것인데, 바다를 통해 인생의 깊이 있는 통찰을 한 프랑스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에 닻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드빌레르의 글을 읽으면서 김수영 시인의 좌우명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빌레르는 닻은 ‘희망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벗어나기 힘든 어려움이 닥쳐도, 모든 것을 잃어도 물러서지 않게 해주는 힘이 닻이라는 것”이지요. “실낱 같은 믿음, 설령 그것이 헛된 믿음이라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확실한 희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닻은 부정적인 생각을 단절시킬 수 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드빌레르는 닻은 “우리가 자신에게 멈추라는 말, 당하고 있지 말라는 경고, 두려움과 계속 생각나는 옛 상처에서 벗어나라는 충고이기 때문에 닻이 있으면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편안한 마음과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닻으로 굳건하게 중심을 잡으면 외적인 감정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고 억지로 변하려 하지도 않아서 진정으로 나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빌레르는 닻을 ‘자신감’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신감이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김수영 시인이 살아계셔서 드빌레르의 ‘닻’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드빌레르가 닻이 자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김수영도 시를 자신의 닻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시는 자유 그 자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