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 일할 때, 새마을운동의 핵심 가치를 ‘상생’과 ‘상호 의존’으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부버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부버는 “나 자체는 없다. 오직 ‘나와 너’ 일 때의 ‘나’, ‘나와 그것’ 일 때의 또 ‘나’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결국 상생과 상호 의존을 강조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버뿐만 아니라 달라이 라마도 비슷한 주장을 했습니다.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 주장한 바 있지요. 지난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서 세계보건기구(WHO)의 어느 간부도 “우리는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두 분의 얘기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는 말과도 연관을 지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도덕경>을 해설한 최진석 교수는, ‘유무상생’은 ‘유’는 ‘무’를 살려주고 ‘무’는 ‘유’를 살려준다는 것인데, ‘유’가 ‘유’인 것은 ‘유’ 자체 때문이 아니라 ‘무’의 관계 속에서 ‘유’가 된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똑같이 ‘무’도 ‘무’ 자체 때문이 아니라, ‘유’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무’가 된다는 뜻입니다.(<새마을운동> 신문 2021.07.08. 자 참조)
이렇게 만물의 원리를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고 생각할 때 상생이란 자신만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상호 의존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얻고, ‘함께’ 나누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웃이 잘 살아야 나도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자본에서 강조하는 공동체 의식도 바로 상생과 상호 의존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내가 누구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그것은 나 자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타인을 배려하면 그 이익이 자신에게 돌아오고 이웃을 파괴하면 바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생과 상호 의존은 인간의 생존 논리가 아닐까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2024년)로 ‘양극화’를 선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 상생과 상호 의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