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선생은, 그분의 생가가 대전시 중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다른 역사적 인물보다도 관심이 더 가는 분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맞서 싸우다 잡혀서 여순 감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그분은 독립협회와 황성신문사의 논설 기자로 활동하였고, 역사에 대한 많은 글을 쓴 역사학자이기도 합니다.
먼저 단재는 ‘역사란 무엇이냐?’라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 상태를 기록한 것”이라고 비교적 난해한 정의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는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말하고 ‘비아’는 ‘그 바깥에 선 자’를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은 조선을 ‘나(我)’라 하고 다른 나라를 ‘남(非我)’이라고 하는데, ‘나’가 있으면 ‘나’와 맞서는 ‘남’이 있고, 또한 ‘나’ 안에도 ‘나’와 ‘남’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 안에도 ‘나’와 ‘남’이 있겠지요. 그런데 역사적인 ‘나’가 되려면 ‘상속성’과 ‘보편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상속성은 ‘생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고, 보편성은 ‘공간에서 영향력이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단재 선생은 다시 한번 ‘나’를 강조하는데, 역사가 되려면 ‘나’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라는 의식이 강한 사회적 행동이어야만 역사가 될 수 있다고 하였지요.
그러면서 단재 선생은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였는데,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쓰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해서 쓸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객관적으로 사회가 움직인 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는 것이 역사다”라고 분명히 하였습니다. 특히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따라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요.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표준으로 해야 하며 민족에는 변하는 성질(變性)과 변하지 않는 성질(恒性)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성질을 균형을 이루게 조정을 해야 오래가며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단재 선생의 역사관입니다. (이상 직접인용은 신재호 글, 이주영 엮음 <신채호 말꽃모음> 참고)
이 글은 가능한 한 단재 선생이 쓰신 원문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소 어색한 문장이 되었는데 단재 선생은 시종일관 ‘나’라는 주체성을 강조하였고, 외세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이분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만일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하면 미국의 노예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도 하여, 당시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과 역사관을 달리하였으며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논쟁은 이어지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