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이는 완장, 보이지 않는 완장

by 염홍철


아주 오래전에 윤흥길의 장편소설 <완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10년 전쯤에 다시 읽었고, 최근에 또 꺼내서 읽어보았습니다. 10년 전에 그 소설을 읽고 글을 쓴 적이 있는데(염홍철 <천천히, 천천히 걷는다> 114~116 참고) 오늘 다시 한번 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소설을 썼던 40여 년 전이나 제가 공직을 마무리한 10년 전이나 오늘날도 똑같은 세태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완장의 사전적 의미는 ‘신분이나 지위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팔에 두르는 표장’입니다. 소설 <완장>에서는 완장을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서 완장의 의미는 일제강점기 경찰과 헌병을 상징하기로 하고, 6·25 때 인민군 점령지에서 머슴과 소작인들이 두른 붉은 완장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자유당 정권 때는 선거 때마다 무더기로 완장을 차고 투표장에 나타나 유권자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5·16 쿠데타 때에는 서울에 진주한 군인들의 팔에 ‘혁명군’이라는 완장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렇듯 완장은 눈에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완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소설 <완장>에서도 팔에 완장을 두른 사람이 아니라 ‘권력의 하수인으로 호가호위하며 으스대는 자들’을 가리켰지요. 소설의 주인공처럼, 기본적 소양이 없는 사람이 권력에 아부하거나 기생해서 쥐꼬리만 한 권한을 얻어 그것을 무소불위로 남용합니다. 그들 중 몇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여 얻은 완장을 또다시 새 주인을 배신하는 데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도 빛깔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수많은 완장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선거 승리의 전리품으로 등장한 많은 완장들, 운 좋게 ‘나으리’는 되었으나 잠재된 열등감으로, 또는 배신한 자격지심으로 오히려 ‘갑질’을 일삼는 완장들, 공익적 기능을 망각하고 지나치게 권력화되고 정치화된 일부 기관의 완장들, 남편의 권력을 자기 권력인 양 주위 사람들을 무시하고 뻐기는 사모님 완장들, 이에 못지않게 꼴불견들은 그 완장들에 기생하여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완장 추종자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습니다.


사실 소설가 윤흥길은 소설 <완장>을 통해 ‘꾀죄죄한 가짜 권력’보다는 그의 행태를 통해 ‘진짜배기 거대 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을 끄집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던가요? 권력은 한없이 길지 않으니까 겸손하고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화(禍)가 된다는 기본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치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