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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쓰는 글들'

by 염홍철


여기저기서 악다구니 소리가 들립니다. 정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저주이며 욕설입니다. ‘인생이 별거 아닌데···’라고 중얼거려 봅니다. 귤 하나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어느 시인의 처지를 보면 저런 행동이 나오기 어려울 건데요.


허수경 시인은 1997년에 등단한 이후 두 권의 시집으로 문단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고, 1992년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도 지속적으로 시집과 산문집을 펴냈는데 7년 전 암 투병 끝에 54세를 일기로 독일에서 타계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분의 작품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이미 암 투병을 하던 시기라 그의 시에는 먹먹함이 배어 있었지요.


그 뒤에는 그의 유고 산문집 <오늘의 착각>을 읽었지요. 이 책의 ‘작가의 말’ 마지막 구절은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다면”으로 마무리했는데 많은 암시가 있었습니다.


2019년에 나온 유고 산문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은 그가 생전에 마지막 쓴 시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귤 한 알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싸우지 맙시다. 그것도 사치이며 배반입니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


허수경


귤 한 알, 창틀 위에 놓아두고

병원엘 갔지


지난가을에는 암종양이 가득 찬

위를 절개했다.

그리고 겨울, 나는 귤 한 알이

먹고 싶었나 보다.


귤 한 알,

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

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

코로 가져갔다.


사계절이, 콧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향기만이.

향기만이.

그게 삶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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