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6일, <아침단상>을 통해서 ‘양면성의 철학을 이해하자’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양면성의 철학을 더 확장하여 다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선과 악, 진보와 퇴보, 성공과 실패처럼 선명한 이분법으로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판단하기도 쉽고 마음도 편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현상 안에 언제나 정반대의 성질이 동시에 내재합니다. 따라서 양면성은 예외가 아니라 존재 방식 그 자체인 것이지요.
인간은 흔히 도덕적 존재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잔혹한 폭력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이 모순은 인간의 일탈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구조적 이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을 에로스(삶의 충동)와 타나토스(죽음의 충동)로 나누었습니다. 사랑은 생명을 향한 힘이면서 동시에 집착과 파괴로 변질될 가능성을 늘 함께 지닙니다. 보호 본능은 양육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베타성과 공격성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근대 사회의 핵심 가치는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늘 통제를 낳았고, 통제는 다시 자유를 요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긴장은 사회의 병리이자 동시에 사회를 유지시키는 힘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 모든 질서는 내부에 그 질서를 부정하는 힘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제도는 인간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규격화하고, 법은 약자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권력을 정당화합니다. 시장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요.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인의 이기심이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되는 구조를 설명했지만, 현실의 시장은 불평등과 독점을 동시에 낳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또한 다수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이지만 동시에 소수의 침묵을 동반합니다.
이렇게 양면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회의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적 나태도 아니고 윤리적 각성의 출발점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을 선과 악의 혼합체로 볼 때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하게 되지요. 우리는 완전한 선을 만들 수 없지만 선이 폭력으로 변질되는 순간을 늦출 수는 있습니다. 결국 양면성의 철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확신보다는 성찰을, 영광보다는 경계를, 승리보다는 균형을 선택하라는 것이지요. 위험한 것은 양면성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양면성을 보지 않으려고 하거나 하나만 옳다고 고집할 때 발생합니다. 그러면서 선과 악의 양면성을 인정할 때, 선과 악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 괴로움으로 남는데, 이 또한 양면성이 있는 게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