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도 양면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가장 깊은 위로를 제공해 온 체계이자 동시에 가장 강력한 공포를 만들어 온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절망 속에서 인간을 일으켜 세웠지만 동일한 신앙은 수많은 전쟁과 박해를 정당해 왔습니다. 종교는 구원의 언어이며 동시에 심판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양면성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궁극의 희망은 전쟁과 재앙, 멸망의 서사와 나란히 등장합니다. 구원은 파괴를 통과한 이후에만 주어지며 천국은 항상 심판대와 맞닿아 있습니다. 신은 사랑의 상징이자 동시에 심판자의 얼굴을 함께 지녔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고통을 견디게 합니다. 그러나 같은 의미는 인간을 가장 잔혹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념이 절대적 진리가 되는 순간 타인은 쉽게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신앙은 인간을 구원하지만, 맹신은 인간을 파괴합니다. 따라서 종교의 문제는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인간이 그 의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일단 종교, 특히 기독교의 핵심인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왜 구원과 심판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얘기하는 양면성은 절대성과 모순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요. 이는 양면성과 절대성은 같은 층위에서 충돌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면성은 세상, 인간 심리, 자연현상, 도덕적 판단 같은 경험의 차원을 설명하는 개념인 데 반해, 절대성은 가치, 진리, 존재론적 근원 같은 초월적 차원에서 성립되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양면성은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는 언어이고, 절대성은 신의 속성을 설명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두 개념이 서로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모순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전통은 구원과 심판을 동등한 두 개의 원리로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며 그 선은 사랑과 정의라는 두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양면성이 아니라 단일한 절대성이 둘처럼 보이는 것이고, 둘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는 다양한 작동 방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혼동하기 쉬운 것은 구원과 심판을 함께 말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구원도 맞고 심판도 맞고 둘 다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의 양비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기독교 신앙의 원리는 둘 다 존재하지만 근원은 하나이며, 그 하나는 절대적으로 선한 심판자이자 구원자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혼란은 없어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