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의 여러 얼굴들

by 염홍철



27세에 최연소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된 마이클 샌델은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많은 저서를 펴냈지만, 그중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2023년에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되었지요. 마이클 샌델은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도덕적 공백의 문제로 진단하였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한국 사회에는 그의 문제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입니다. 특히 능력주의, 시장화, 정치 혐오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능력주의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공정의 이름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시험 성적, 스펙, 성과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증명하는 객관적 지표로 간주했죠. 그러나 샌델이 지적하듯 능력주의는 성공한 자에게는 도덕적 우월감을, 실패한 자에게는 자기혐오를 남겼습니다. 한국에서 경쟁의 강도가 유독 잔혹한 이유는, 실패가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자격 없음’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회적 연대를 악화시키고 공동선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있습니다.


둘째, 시장화입니다. 한국 사회는 효율과 경쟁의 논리를 거의 모든 영역에 적용해 왔습니다. 교육은 투자상품이 되었고, 노동은 비용으로, 시민은 관리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치 역시 예외가 아니지요. 정책은 가치의 선택이 아니라 숫자의 계산으로 인정되고, 국정은 잘 관리되는 회사처럼 설명되었습니다. 이는 샌델이 말한 민주주의의 탈정치와, 즉 정치가 공동선을 논의하는 공간에서 기술적 운영으로 축소되는 현상과 정확히 중복됩니다.


셋째, 정치 혐오입니다. 능력주의와 시장화가 결합한 사회에서 정치는 더 이상 삶의 방향을 묻는 장이 아닙니다. 시민들은 정치에서 도덕적 의미나 공동의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결과 냉소와 무관심으로 물러납니다. 한국 사회의 정치 혐오는 시민의 무책임이라기보다 정치가 스스로 도덕적 언어를 포기한 데서 비롯된 결과에 가깝습니다.


이상의 지적에서 샌델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민주주의는 절차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시민을 도덕적·공동체적 존재로 길러내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결국 시장에 잠식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성장의 속도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공동체로 살고 싶은가를 다시 묻는 정치의 회복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시 ‘좋은 삶’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이 힘주어 주장하는 명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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