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이념 지형은?

by 염홍철


우리는 오랫동안 세상을 ‘좌’와 ‘우’로 이해해 왔습니다. 누군가는 시장을 강조했고, 누군가는 복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그 오래된 좌표가 점점 흐릿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에서 보수는 자유의 이름으로 국가의 개입을 강화하기도 하고, 유럽에서는 복지국가를 지키면서도 이민과 국경을 더 강하게 통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중동에서는 정치적 이념보다 종교와 정체성이 더 강한 기준이 되고, 한국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상반된 언어는 더 강화되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서로 닮아가는 장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보면, 미국에서 트럼프 현상은 단순한 보수 회귀라기 보다 우익 포퓰리즘, 반엘리트 정서라는 문화 전쟁이 결합한 재편에 가깝습니다. 유럽은 사회민주주의의 유산을 제도화해 왔기 때문에 보수 정당도 복지국가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중도 좌파도 시장 경제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제 정책만 보면 좌우 경계가 흐려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경계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유럽의 핵심 분기점은 복지국가의 존폐입니다. 이민, 국경통제, EU통합, 문화적 정체성, 대외정책, 법치규범으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외교안보, 대북접근, 검찰·사법개혁, 조세·복지의 우선순위, 노동시장 규제, 역사·정체성 문제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큽니다. 다만, 그 차이가 과거처럼 ‘국가 대 시장’ 하나로 설명되지 않고, 실용/반실용, 제도개혁/질서안정, 대결동원/성과관리 같은 다른 축으로 재배열되는 중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도 세계적 흐름과 비슷하게 이념의 종말이 아니라 이념의 언어가 실용·민생·국익의 언어로 바뀌는 단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유럽, 중동 그리고 한국을 함께 놓고 보면, 현재 세계 이념 지형의 변화는 대략 5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이념이 중도 수렴될 것입니다. 좌·우 모두 시장과 복지를 혼합합니다. 둘째로 문화·정체성 쟁점이 전면화될 것입니다. 이민, 젠더, 종교, 역사서사, 국가 정체성이 핵심 전장이 되지요. 셋째는 국가의 귀환입니다. 안보, 공급망, 산업정책, 기술규제를 위해 좌·우 모두 강한 국가를 원합니다. 넷째, 포퓰리즘의 제도권화입니다. 반제제언어가 이제 체제 내부에서 사용됩니다. 다섯째, 민주주의 형식은 남아도 규범은 약해지는 현상입니다. 선거는 유지되지만, 패배인정과 존중·타협 문화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향후 전망은 우경화의 지속, 실용주의 확대,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의 경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습니다. 앞으로의 핵심은 좌파냐 우파냐 보다 어느 체제가 더 유능하면서도 자유와 견제를 지키느냐가 될 것입니다. 최근 각국의 선거와 정책 흐름은 이 세 방향이 동시에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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