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쓰고 잘 벌기

2월 23일

by 박유미

부지런한 기사님은 토요일에도 일찌감치 새벽을 여시고 게으른 나는 커터칼을 들고 비몽사몽 택배 상자를 연다. 가지런히 놓인 4,900원짜리 티셔츠 두 벌을 꺼내며 흥에 겨운 내게 어머니는 한 마디 하신다. "괜찮은 것 좀 사." 대기업까지 다니던 서른두 살 딸이 싸구려 면티 쪼가리를 사모으는 게 한심하실 만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 집으로 올 궁상맞은 택배 상자가 두 개나 더 있는 걸. SPAO의 2만 원짜리 스누피 모자를 4,900원에, NII의 체크 셔츠를 1,900원에 파는데 나 같은 '가성비 쇼핑' 중독자는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위메프와 티몬 어플, 네이버 쇼핑(특히 가격순 정렬)이 없었더라면 이런 궁상맞은 쇼핑은 오프라인의 할인 매대 탐방에서 그쳤을 것이다. 백화점에는 이월상품이 모인 매장이 구석에 따로 있어서 제철 옷을 파는 정규 매장으로부터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같은 브랜드의 옷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서울에 갈 일이 있을 때는 가산디지털단지의 의류 아웃렛을 순례하기도 한다. 대형마트는 유통기한이 가까워진 식료품을 따로 모아 두고 반값 이하로 판매한다. 남편은 백수 시절 그곳에서 식빵과 잼, 시리얼을 사다 나르며 일용한 양식을 마련했고 나는 지금도 요거트를 사러 롯데슈퍼의 할인 매대에 들른다. 제값을 다 주고 요거트를 사 먹는 건 내게 아직 사치스러운 일이다.


온라인 가성비 구매는 게임과 비슷하다. 쇼핑 어플의 '베스트' 메뉴를 누르면 판매자가 약간의 출혈을 감수하면서 파격적으로 선보이는 딜을 종종 찾을 수 있다. 지하상가 옷가게의 맨 앞쪽에 놓인 '한 장에 5,000원!' 같은 미끼 상품이다. 더 유리한 딜이 뜨길 호시탐탐 기다리다가 민첩하게 접근하여 나의 필요와 욕구, 상품의 효용과 비용 등을 고려하여 구입 여부를 결정하는 게 이 게임의 진행방식이다. 원하는 상품명을 입력해서 찾아다니고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들이 먼저 조건을 제안하기 전에는 내 카드를 꺼내지 않는 이런 게임이 주는 금전적·감정적 보상이 훨씬 크다. 물론 배송된 결과물이 쓸만할 때에 한정해서.


검색 결과와 상품설명 페이지 독해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생각하면 딱 인건비만큼 저렴한 물건을 찾아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쉽고 무심하게 비싼 것을 사는 대신 조금 관심을 기울여 저렴하게 소비를 하면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사고 내가 원하는 경험을 누리는 데에는 생각만큼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내가 더 많은 돈을 벌도록 나 자신을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싸면서 질 좋은 물건을 사기가 흔치 않은 일이듯 많이 벌면서 스스로에게 억지스러움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일을 하면서, 그리고 그 일에 부합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내게 필요한 것을 조달할 수 있는 상태.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 내가 부여한 균형감각이다.


적게 쓰고 적게 버는 삶. 번거로워도 재미있는식으로 소비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버는 삶. 그 삶이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궁핍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재취업을 하기 직전에 부모님과 다녀온 9박 10일의 여행 덕분이다. 예전 회사에 계속 다녔더라면 공채 동기들처럼 과장 승진을 목전에 두고 연봉을 높이고 있었겠지만 다시 얻은 직장이 내 통장으로 보내줄 금액은 턱없이 적었다. 첫 출근을 앞두고 부랴부랴 여행을 떠난 것도 '앞으로는 해외여행을 꿈꾸는 자체가 욕심일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인천과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발리를 잇는 하늘길은 놀랍게도 1인당 26만 원밖에 하지 않았다. 에어아시아 항공의 좁은 좌석과 잦은 연착으로 인한 불편은 여행의 설렘에 묻혀 희석되었다. 발리의 널찍한 3인실 숙소는 또 어떠한가. 정성이 든 아침밥을 차려주고 호사스러운 꽃나무들이 가득한 멋진 마당에 수영장까지 딸려있는데도 1박에 4만 원밖에 하지 않았다. 바로 뒤편의 건물이 신혼부부들에게 인기 있는 고급 리조트로 숙박료가 수십 만 원에 달한다는 건 유명했지만 우리가 묵은 숙소에는 한국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욕심껏 음식을 주문해 부모님과 배부르게 먹어도 밥 값이 만 원이 채 안 되는 소박한 동네 식당들은 덤이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행은 오히려 내게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앞으로도 나는 잘 살겠구나. 그 방법이나 양상이 이전과는 다를지라도 조금 번다고 해서 내가 누리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배우고 싶은 게 생기면 온라인 무료 강의를 듣고, 선물은 약국 대신 해외직구로 산 비타민을 주고, 굳이 유행을 따지지 않고 내게 어울릴만한 저렴한 옷을 샀다. 재미있게도 이런 소비의 방식은 역설적으로 벌이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게 했다. 직장에서 운 좋게 받았던 상금 60만 원을 선뜻 기부하겠다고 나섰던 것도 '나는 이 돈이 없어도 되니까'라는 생각이 기저에 존재해서였던 것 같다. 또한 그 돈이 팍팍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크게 쓰일 돈인지도 알았으니까.


싸구려 옷들을 못마땅해하시는 우리 어머니지만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알뜰하게 사다 드리면 무엇보다 반가워하신다. 슈퍼에서 익숙하게 구입하시던 세제, 커피, 토마토, 새치염색약이 인터넷으로 결제하면 훨씬 저렴하다는 것을 강조한 덕에 나는 요즘 우리 집 장보기를 많이 도맡았다. 갖고 싶으셨지만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내시던 경량 패딩점퍼도 잘 훈련된 나의 쇼핑 검색 몇 번에 훌쩍 가격이 떨어졌다. 올 겨울은 외출할 때마다 가볍고 따뜻한 점퍼를 입으며 흐뭇해하셨다. 값나가는 것을 턱턱 사다 드리면 더 좋으련만 아직은 가까이서 더 신경 써드리고 귀찮은 일들을 도맡는 것으로 부모님께 드리지 못한 것들을 대신하고 있다. 내가 내 한 몫을 잘 살아가는 것이 부모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리라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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