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시댁 대신 혼자 뉴욕 간 이야기를 해볼까요
"2023년 추석 연휴에 혼자 뉴욕 여행을 했어요. 아이와 남편은 시댁에 보내고요." 앞에 앉은 낯선 이를 즐겁게 해주고 싶을 때 나는 뉴욕 이야기를 꺼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흥미를 일으켰다. 기혼자들에게는 경이롭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눈들이 내게로 다가오는 순간이 좋아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종종 그 이야기를 꺼냈다. "책을 써볼까 혼자 구상도 해봤어요. 제목은 <엄마 혼자 여행 좀 다녀올게>, 부제는 <이번 추석은 시댁 대신 뉴욕으로>." 너무 좋은 생각이라고, 그 제목으로 꼭 내보라고 응원하는 목소리로 대화가 마무리되곤 했다.
뉴욕에 다녀온 지 2년이 넘었지만 나는 아직 한 줄도 뉴욕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응원이 무색하게 내 마음 속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과연 내가 그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기발한 경험, 다른 누군가에게는 흔한 배낭여행 추억, 그리고 나에게는 선뜻 글자로 소환하지 못하는 막연한 시간. "나는 2023년 추석에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로 시작해 이동 루트를 짚는 글쓰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럼 무엇이 어려운가. 그 글이 자기 몸을 갖는 걸 두려워하는 나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다. 여행이 어떻게 좋았는지 정확히 표현하지 않으면 그 좋았던 점들이 휘발될까봐 겁이 났다. 당장 '좋다'는 표현조차도 많은 면을 간단히 뭉뚱그리고 지워낸다.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한참 응시해야 그 순간을 되살리고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게 아주 귀찮은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 내 눈 앞을 지나는 오만가지 풍경들에도 어지러운 마당에. 이왕 기억을 끌고 나올 거라면 그 애가 적절한 구성과 형식을 갖추어 그럴 듯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고 거리를 활보하면 좋겠다. 한 문장 적으려면 이렇게 바글바글한 변명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3년치 일기를 꺼내 읽는 '일기 독서' 중 뉴욕으로 떠나기 두 달 전에 쓴 내용을 읽었다. '이번 추석 연휴는 가족들과 강원도 여행을 할 수도 있겠다'고 쓰여있다. 도대체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근무 중 문득 국외연수 신청 공고를 발견하고, 한때는 오래 떠돌았지만 한참 잊고 지내던 외국의 기억을 떠올리고, 출장지를 탐색하다가 지원 없이 혼자 자유롭게 다녀보자고 결정하고, 가족과 상사에게 휴가 허락을 받고, 비행기표 구입을 마쳤다. 이 과정이 불과 열흘도 안 걸렸다. 강원도가 미국 뉴욕으로 바뀌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저지른 일인데도 신기해서 흥미로운 마음으로 일기장을 넘겼다.
감사 기간이라 여행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굳이 빡빡하게 계획할 생각도 없어 몇몇 예약 건을 제외하고는 듬성하게 일정을 짰다. '9월 30일. 오전: 자연사박물관, 오후: 센트럴파크' 이런 간단한 메모로 일정표가 채워졌다. 막상 가서는 이 헐렁한 계획조차도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호스텔 로비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고 도보여행 그룹에 참여하거나, 한국에서는 소식도 알지 못한 뉴욕국제영화제를 보러가거나, 옆 침대 쓰는 대만 여자애랑 마음이 맞아 함께 타임스퀘어를 거닐었지. 내가 알 수 없었던 모든 일들이 거기, 맨해튼 한복판의 박유미에게 있었다. 일기를 펼쳐보며 수없이 많은 내가 나의 위로 겹쳤다. 미래의 내가 예감이라는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기도했다.
나는 깜짝 선언을 한다. 이번 추석에 나만 시댁에 안 가겠다고, 아니 2년 전에 일어난 일을 오늘의 이야기로서 쓰겠다고. 누군가에게는 파격적인 시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남들도 다 하는 흔한 일, 그리고 나에게는 새로운 글이 몸을 갖는 탄생의 체험. 오늘 쓰는 이 글에는 꼼꼼한 이동 서사도, 실용적인 여행 정보도 없다. 그러나 2년 내내 그토록 쓰고 싶었고 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던 나의 뉴욕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의 나는 2년 전의 나와 비로소 연결되고, 그때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뉴욕의 재즈 공연장과 호스텔에서 겪은 '좋음'들이 오늘에 도착해서야 자기 몸을 갖는다. 오늘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향해 용기낸 내가 참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