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치 일기장을 꺼내 읽으며
3년치 일기를 꺼내 한 문장 그리고 또 한 문장 정독했다. 남이 쓴 책을 읽듯 감상을 기록하고 마음에 닿는 문장을 필사했다. 다 읽는 데 두 달이 걸렸다. 내가 쓴 내 일기인데도 읽다가 자꾸 턱턱 걸려 넘어졌다. 켜켜이 쌓인 낱장들을 헤집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냐고 일기장 바깥의 내가 투덜댈 때마다 한참 우물쭈물하느라 일기 독서 작업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일기장 10권을 거실 바닥에 쭉 늘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던, 일기 독서가 비롯된 그 순간을 생각한다. 출판사 사은품으로 받은 증정용 노트부터 손바닥만한 메모 노트, 얇은 공책을 3권 이어붙여 만든 노트, 외국 문방구에서 사온 노트, 잘 안 펴진다고 뚝 잘라 반토막만 사용한 노트까지 가지각색이었다. 다꾸(다이어리 꾸미기)까지는 아니어도 정갈한 양장 노트 정도는 구입해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본다면 너무 무성의하지 않냐고 성토할 수준이었다. 내 평소 차림새나 행동을 아는 사람들은 박유미답다고 했을지 모르지. 보기에 썩 좋지는 않지만 특유의 무성의함 덕분에 내 일기 쓰기는 3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심히 고른 고급 노트를 끝까지 쓰기 위해 애쓴 적도 없었고, 기한을 정해 쉬지 않고 계속 쓰겠다고 결심한 적도 없었다. 내 일기장은 오직 오늘 하루치 일기를 쓰는 행위만을 위해 존재했다. 정성껏 보관할 의지도, 다시 펴볼 계획도 없었으니 뒤죽박죽 서로 다른 종류의 노트에 무던히 적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꾸준히 노력하고 제대로 해낸 게 지난 몇 년 간 도대체 뭐가 있나. 자신을 향한 의심과 허탈한 기분은 예외 없이 부지런히 찾아오고, 우연히 책장 구석에 쑤셔둔 일기장이 눈에 들어온 순간도 그런 흔한 날들 중 한 때였다. 그곳에서 드디어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의외의 구석을 찾아냈다. 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 일기를 쓰고 있었다! 아침을 차리고, 아이의 이를 닦아주고, 나의 영혼과 상관 없지만 붙잡아야만 하는 일들을 이어가고, 퇴근을 하던 그 반복과 지겨움과 인생의 틈새에 매일 일기가 있었다. 나는 관심에 굶주리다가 칭찬 받을 거리를 기어코 찾아낸 꼬마처럼 들떴다.
3년 전부터 오늘까지 이어진 기나긴 기록을 다 모으면 손아귀에 한번에 잡힐 정도의 두께가 된다. 그 전에 썼던 일기는 블로그와 여러 노트에 제각기 흩어져있다. 로그인 계정을 잊어버린 것도, 별로 남길 가치가 없다고 여겨 폐지로 처리한 것도 있다. 대부분 거창한 마음으로 시작해 흐지부지 뒷방으로 밀려난 기록들이라 '나는 꾸준히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기인식만 남기고 선사시대처럼 뿌옇게 사라졌다. 다짐은 시시할수록 좋다는 건 늦게 알았다. 2023년 1월 14일, 일기 첫 장(정확히는 다른 용도로 쓰다가 버려진 노트의 15페이지 즈음)을 단 한 줄로 채웠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오늘 점심은 김미경 팀장님과 샤브샤브를 먹었다.' 따위의 한두 문장을 쓰고 일기장을 덮었다. 더 쓰고 싶은, 더 써야 할 이야기가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걱정하고 움직이고 닥달하고 실망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어떤 것도 일기장에 쓸 수 없었다. 무심하게 쓰다만 노트를 재활용해 만든 나의 일기장은 그 한 줄이 하루의 기쁨을 싹싹 긁어모으려 애쓴 결과임을 이해하고 기꺼이 품었다. 짧고 기묘한 한두 줄짜리 일기는 그렇게 몇 달을 이어졌다.
시시한 문장이라도 매일 남겼다. 거죽만 헐렁하게 걸치고 연명하는 기분으로 살아가는 건 더 이상 싫어서 나의 알맹이를 끈질기게 쫓아가야 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건 시간뿐이니 나의 시간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걸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하루 중 잠시라도 불이 반짝 들어온 순간들을 떠올려 일기에 남겼다. 쓴다는 건 신기한 행위다. 특별한 일이라서 기록하기도 하지만, 기록하기 때문에 그 일이 특별해지기도 한다. 팀원들과 카페에 가서 라떼를 마시고, 버스를 잘못 타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아이가 방구 뀐 다음에 배시시 웃은 일을 기록했더니 그 일들이 모두 대단한 사건으로 변했다. 처음 가 본 책방에서 조심스럽게 책을 꺼내고, 벌거벗은 아이가 변기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순간에도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고 시간 한가운데 온전히 설 수 있었다.
자기기록이 주는 기쁨을 천천히 맛보기 시작했기에 곧이어 책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전념할 수 있었다. 에세이는 타인과 세계를 향한 자기기록이라는 점에서 전달방식을 세심히 다듬어야 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허울이 되지 않으려 저항하는 '일기 쓰는 마음'은 에세이 출간 작업에서도 그대로인 것 같다. 초고를 쓰고, 퇴고를 반복하고, 독자와 만나는 모든 과정들이 일기를 통해 또다른 기록으로 남았다. 세상에 중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부족한 내가 고작 나만 들여다보느라 애쓰는 게 민망하기도 하다. 자신을 골똘히 들여다본 시간으로 인해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영향을 타인과 세상에 미쳤음을 또 일기로 확인하며 용기를 내볼 뿐이다.
내 오래된 일기장을 읽으며 사실 좀 재미있었다. 주인공에 관한 배경정보가 풍부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상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주인공이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할지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다. 내가 다 살아봤으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어느 한 순간의 나는 누구보다 복잡한 존재로 읽힌다. 결과를 맨 처음 보여주고 사건의 원인을 향해 과거로 돌아가는 영화와 비슷하다. 단순한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도 이미 알고 있는 미래와 연결시키면 놀라운 의미가 드러난다. 평면적인 인상으로 사건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팀장과 샤브샤브를 먹는 장면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굳이 파헤치지 않겠다.
3년 치 일기장을 읽으며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일기 읽기적 관점'이다. '전지적 주인공 시점'이라고 불러도 나쁘지 않다. 언제나 지금을 살아가는 주인공은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해 '평면적인 인상으로 판단'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미 다 살아본 사람처럼 느긋하게 관조하며 심연을 들여다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에게 지난 3년 동안 쓴 일기장을 쥐어주며 한 장씩 넘겨보라고 말해줄 수는 있지 않을까. 맥락을 모두 이해한 채로 과거의 일기를 읽으면 하나의 사건도 여러 개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걸 볼 수 있어. 한때 너를 불쾌하게 만든 경험 덕분에 네가 위험을 피하기도 하고, 즐겁게 벌어들이기만 했던 이득이 사실 너를 좀먹기도 하지. 새옹지마가 항상 맞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은 현재에 대해 언제나 맹목적이라는 걸 깨달아야 다른 관점을 지녀볼 수 있어. 말로 설득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일기장을 두 달 동안 1,000쪽 넘게 들여다보면 저절로 익숙해질 수 있을 테니까.
미래의 어느 순간에 존재할 '일기 독서인'의 눈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본다.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마음 속에 작은 반짝임이 튀어오를 때마다 기록해두면 그 보잘 것 없는 점들이 은하수를 이루리라. 언젠가 내가 우주 속으로 흩어지는 날, 거기에서 당신은 누구였냐고 물으면 나는 '일기 쓰는 사람'이었다고 대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