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인데도 불구하고

겨울 제주에서 보낸 닷새

by 박유미

새해를 제주에서 맞이했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찾아 일정을 짰더니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월요일 오후에 출발해 금요일 오전에 도착하는 항공권을 골랐을 뿐이다. 막 백수가 된 남편과 유치원 방학을 맞이한 아이는 여행 계획을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이라고 이 무심한 일정을 '연말연초 기념'이라 해석했을 리 없다.


우리 셋이 지난 몇 년간 구축해온 나름의 여행 스타일이 있다. 캐리어가 없고, 렌터카가 없고, 호캉스가 없다. 대신 배낭을 메고, 도보 여행을 하고, 1박에 5~8만원 짜리 숙소에서 묶는다. 4박5일 여행 정도면 배낭 두 개로 거뜬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부칠 짐이 없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아이도 책과 장난감으로 묵직한 가방을 씩씩하게 메고 다녔다(올 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쓸 책가방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이 소유한 차가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열차와 버스로 닿을 수 있는 지역을 목적지로 정하고 도보 관광이 용이한 위치로 숙소를 고른다. '차 없는 삶'의 노하우가 꽤 쌓여서 제주에서도 굳이 차를 빌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숙소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이 아니라 적당히 묵을 만한 곳으로 예약한다. 중심지 인근이고 리뷰가 괜찮으면 그만이다. 이번 제주 숙소도 1박에 7만원으로 동화처럼 꾸며진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다.


10kg 짜리 배낭을 메고 8인실 도미토리룸에 묵으며 1년을 돌아다니던 내가 비슷한 감각을 지닌 사람과 결혼해 일종의 가족 문화를 만든 셈이다. 더 편하고 더 고급스러운 여행, 남들이 모두 좋다고 말하는 여행은 언제든 기회가 될 때 해보면 그만이다. 나는 한계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더 깊게 체험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우리의 삶에 선물하고 싶었다. 일상에 없는 눈부신 풍경과 푹신한 침대를 누리는 것이 여행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일상을 더 노골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여행한다. 어색하고 예측할 수 없는 비일상에 뛰어들 때에만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는 일상의 균열이 있다. 기꺼이 자신에게 불편함과 부족함을 허락하며 낯선 장소와 나를 연결하는 고유한 감각을 벼린다면 여행지는 생생한 사유의 장이 된다.

애월과 한림의 겨울 바다는 예상보다 훨씬 추웠고, 유명한 관광지는 지루하고 번잡했으며, 일부러 찾아간 맛집은 자리에 앉은 지 50분이 지나서야 백반을 차려줬다. 허기에 지쳐 허겁지겁 먹었지만 한 상 가득한 음식 중 밥이 제일 맛있었다. 기대는 엇나가고 희망은 꺾이며 외부인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닷새 내내 참 재미있게 지냈다. 남편과 아이, 나는 각기 다른 면을 좋아했다. 남편은 광폭한 파도 앞에서 바람을 견디며 한참 서있었고, 혁은 바닷물이 살짝 고인 현무암 바위를 관찰했으며, 나는 추위에 어쩔 줄 몰라하며 바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남편은 애월읍 과오름 아래 자리한 '카페 일큐팔사'에 푹 빠졌고 카페 사장님이 추천한 LP바와 재즈클럽도 부지런히 다녀왔다. 혁은 숙소 드나들 때마다 하얀 강아지와 놀았던 게 이번 여행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단다. 동네 주민만 알만한 나즈막한 오름들을 오르내리며 부러진 나뭇가지로 아빠와 총싸움을 했던 것도. 나 또한 과오름과 민오름에 다녀온 게 정말 좋았지만 부자가 총싸움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번 여행 중 내게 가장 짜릿했던 기쁨은 어느 도넛 가게 방문이었다. 제주까지 간 마당에 프랜차이즈 체인점 앞에서 줄 서는 건 질색이라 혼자서라면 절대 안 갔을 텐데, 무심코 남편이 권유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들어갔다. 그런데 도넛이 기대보다 훨씬 맛있었고, 줄 선 사람이 별로 없는데다 내부 공간도 여유로웠고, 3층 테라스로 나가자 해변이 탁 트이게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꼭 우리에게 좋으리란 법은 없지. 그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측불가한 행운들을 맘껏 품으며 살아가자. 나는 이런 생각들을 하며 테라스에서 노는 혁과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주의 풍광이 아니라 우리 셋이 함께 여행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게는 가장 놀랍다. 서로 다른 것을 좋아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세 명이 지치지 않고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다. 우리가 함께 모여 살아간다는 게 매일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가족이라서'라기보다는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잘 맞춰가며 지낸 우리 셋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가족이라서'가 아닌 이유는 우리를 지켜낸 힘이 혈육 간의 사랑으로 당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선을 지키며 상대를 조심스럽게 여긴다. 상대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나의 빈 구석을 드러내며 서로를 채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둥그런 원이 되어 데굴데굴 굴러간다. 매일 놀라워하며 신나고 즐겁게. 그렇게 제주에도 잘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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