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파티에서 시작된 독서 기록
지난 12월 27일, 독립서점 '바베트의 만찬'에서 연말을 기념하는 파티가 열렸다. 치킨 두 마리 사들고 책방으로 들어가니 그동안 독서모임에서 마주쳤던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길다란 탁자 위에 각자 마련해온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온갖 종류의 치킨들 사이에 우리 가족이 사온 치킨도 자리를 잡았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소설 <바베트의 만찬>의 저녁 식사 장면을 떠올랐다. 축하 공연과 책방 4주년 기념 대담이 뭉클한 마음의 여운을 길게 이끌고, 파티의 마지막 순서인 책 교환식만을 남겼다.
미리 책방에 들러 각자가 고른 '올해의 책'을 한 권씩 제출한 터라 이미 무대 옆에 곱게 포장된 책 오십여 권이 쌓여있었다. 다들 우리처럼 이 책을 받을 누군가를 상상하며 고심하고 또 즐거워했겠지. 산타가 된 듯한 기쁨을 만끽하기에도 바빴기에 우리가 어떤 책을 받을지 기대할 여유는 없었다. 무작위로 책을 주고받은 다음 자리에 앉아 포장을 뜯었다. 남편과 아이, 나의 무릎 위로 낯선 책 세 권이 올라왔다. 평소 책을 고르던 관성만을 따른다면 만나지 못할 책들이었다.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던 책, 언뜻 보았지만 내 취향과는 다를 거라고 넘겨 짚었던 책, 초면이지만 표지조차도 식상하게 느껴지는 책. 성의를 감사하게 받고 책장 한 구석에 꽂아둔 채 잊을 수도 있었는데 이 날은 뭔가 이상했다. 이 선물들이 열어주는 세계로 활짝 팔 벌려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다. 그래야만 이 파티가 진짜로 끝날 것만 같았다.
8일 만에 세 권을 다 읽었다. 파티 다음 날 바로 한 권을 읽고, 제주 여행 하며 나흘 동안 또 한 권 읽고, 돌아와서 사흘 간 남은 한 권을 마저 읽었다. 유튜브 먹방 하듯 독서 양과 속도를 뽐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책을 완독했다는 것, 글자 한 톨 흘리지 않고 싹싹 먹었다는 점만은 뿌듯하다.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내 남편이라면 그게 뭐 자랑이냐고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지독하게 입이 짧은 독서가다. 맛없는 책은 딱 한 입만 먹고, 지루한 책은 몇 숟가락 더 뜨고나서 치워버린다. 작년 한 해 동안 161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꼭꼭 씹어넘긴 책은 반의 반도 안된다. 무작위로 주어진 책들을 포기하지 않고 완독하는 건 내게 스카이다이빙 하듯 두 팔을 벌려 하늘로 뛰어드는 모험이었던 셈이다.
파티에서 돌아와 바로 읽었던 첫 번째 책은 요코제키 다이의 <삐에로의 소원해결소>이다. 해리포터 옷을 입고 파티에 참석한 10대 여자아이에게 앙증맞은 캐릭터 양말과 함께 선물 받은 책이다. 양말도, 책도 왠지 난감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도 이런 취향이 아니었는걸. 시나모롤과 하트로 가득한 양말을 신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지금은 '새로운 취향이 뭐 어때서' 싶지만. <삐에로의 소원해결소>는 제목과 표지에서 연상되는 편견만 조금 내려놓고 읽기 시작하면 청소년 문학으로서의 미덕이 고루 눈에 띄는 좋은 책이었다. 지방공무원 세계를 꽤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성실함, 사건을 빠르고 가볍게 끌고 가면서 미스터리 문학의 매력을 맛보여주는 친절함, 미래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건네는 따듯함이 돋보였다. 마지막 10페이지까지 감춰져있던 비밀들이 매가리도 없고 어처구니도 없어서 아쉽지만 어린 친구들에게 미스터리 입문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어쨌거나 나도 앉은 자리에서 후루룩 다 읽을 만큼 재미있었다.
제주를 오가며 읽은 두 번째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다. '바베트의 만찬' 파티에서 사회를 본 분께서 내 남편에게 선물해주신 책이다. 도서관에서 보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아 선뜻 집어들지 않았던 책이었다. 책 속에 든 편지에 "이후 읽은 책, 본 영화, 접한 음악 모든 것에 영향이 있었다"라고 쓰여 있어 기대가 되었다. 공항에서, 비행기 안에서, 숙소에서 차근차근 책장을 넘겼다. 텔레비전 연출가로 경력을 시작했기에 생겨난 독특한 제작 태도가 책을 가로질렀다. 20년 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영화로 지어온 그의 고유한 내면을 따라가는 게 흥미로웠다. 무엇이 옳고 좋은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흔들리며 살아왔노라 보여주는 책이 좋다. 우리에게 남은 건 미지의 세계뿐이니 앞으로도 흔들리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책이 가장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
사흘 간 끙끙거리고 허덕여가며 읽은 세 번째 책은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이다. 포장을 뜯고 제일 기대했던 책인데 실상은 제일 힘들게 읽었다. 이 책을 주신 윤미 님은 이승우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어 1년에 걸쳐 모든 출간작을 읽으셨다고 했다. 나도 그의 에세이집을 두 권 읽었지만 소설로 넘어가기에는 큰 벽이 느껴져 주저해왔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 완독의 여정을 시작했고, 겁 먹은 바와 같이 책은 쭉쭉 읽히지 않았다. 428쪽에 달하는 책 두께가 거대한 산맥처럼 느껴졌다. 숲을 헤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며 겨우 발걸음을 옮겨도 아직 저 멀리 산 봉우리가 몇 개 더 남아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경을 바라보는 기쁨은 끝없이 펼쳐졌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걸음을 옮길 필요도 없이 비탈길을 데굴데굴 구르며 내려왔다. 땅바닥에 닿아 책장을 덮은 후에 비로소 나는 나뭇가지에 긁히고 흙투성이가 된 나의 몸을 발견했다. 아, 나는 이 책을 경험하고 왔구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 두 다리로 헤치고 지나왔구나.
이번 독서를 통해 용기를 얻었다. 내가 잘 모르는 책, 나와 맞지 않다고 여긴 책, 내가 못 읽을 거라고 여긴 책들이 덜 무서워졌다. 도서관에서 빌린 김혜순의 시집과 증여에 관한 사회과학 책을 두어장 넘긴 다음 책갈피를 꽂았다. 익숙하지 않고, 흥미가 떨어지고, 읽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낯선 산길에 뚝 떨어지고 굽이굽이 재를 넘어 다른 사람으로 살아본 내 두 다리가 있으니 겁나지 않는다. 나는 '독서가 주는 가치'가 아닌 '독서 하는 시간'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