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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Feb 19. 2021

바둑에 대해 말할 때

가로 세로 19줄이 만드는 예술

살아오면서 한눈팔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해온 취미가 있다면 바둑이다. 우리 집안은 바둑을 즐겨두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회고해보면 명절, 조부모님 제사 때 도회지에서 오신 숙부님들도 바둑을 잘 두셨다. 그때는 숙부님들에게 많게는 4점을 깔고 균형을 맞췄다. 당시 고수였던 숙부님들이 나와 바둑을 두어주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초중반 우세한 바둑을 종반에 망치는 날에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곤 했다. 억울하고 분하게 느껴졌다. 다 잡았던 큰 물고기를 놓친 기분이랄까. 잡았다가 놓친 물고기는 항상 크게 느껴진다는 외국 속담이 맞는 말이었다. 사람 기분이란 게 그렇다. 숙부는 묘수를 찾아낸 것인데 어린 조카를 속여 이긴 술수라고 생각했다. 숙부를 넘어서려고 바둑책을 열심히 보았다. 한때는 전문기사가 되고 싶었다.


위로 두 형이 있는데 우리 삼 형제는 바둑 실력이 용호상박의 호각세이다. 지금은 큰 형이 뒤쳐지기는 하지만 그 연령대로 보면 아마 고수다. 바둑에서 한 집은 실력 차고 반집은 행운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 격언을 믿는다. 치열하게 바둑을 두다 보면 한 집이 얼마나 큰 집인 줄 알게 된다. 승부의 세계에서 화국(和局)이란 말이 제일 좋다. 덤이 없는 바둑에서 쌍방이 비긴 것이다. 좀처럼 생기기 어려운 경우의 수이지만 화국은 서로를 기분 좋게 하고 뭔가 행운이 뒤따를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서로가 만들어 낸 상서로운 기운이다. 


나는 바둑을 잡기라고 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둑의 깊은 세계를 잘 몰라서 하는 무지의 말이라고 일갈한다. 잡기가 아니라 종합예술에 가깝다. 요즘엔 아시아드 대회에서 바둑이 스포츠 종목으로 채택되었다고 하지만, 스포츠로 단정 짓기엔 뭔가 아쉬움이 많다. 바둑 기사는 가로 세로 19줄이 만들어내는 경우의 수를 읽어내고 반상의 균형과 조화를 맞춰가는 반상의 마술가다. 그들이 발견해 낸 수는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예측까지 하면서 수를 내고 착점 한다고 생각하면 대단한 두뇌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주어진 시간에 판세를 읽어내고 지금 착점 하려는 수가 상대의 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값까지 예측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대 프로기사 가운데에서 서봉수 명인을 존경한다. 서 명인이 대국하는 프로는 놓치지 않고 시청한다. 그는 우리나라 프로기사들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활약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순수 국내파이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순 된장 바둑이라는 애칭이 따라다닌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전투적인 바둑을 구사한다고 해서 야전사령관이라고도 부른다. 야전 사령관 서 명인이 척박한 국내 바둑 환경에서 독학으로 공부한 것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바둑 황제 조훈현이 일본 유학 후에 귀국하여 국내에서 오랫동안 왕좌에 앉아 있을 때 그 왕좌를 빼앗기 위해 가장 처절한 결투를 벌인 기사가 서봉수이다. 서봉수 명인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바둑은 조훈현의 1인 천하가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독식은 한국 바둑 생태계에도 긍정적이지 않다.  


53년생 서봉수는 지금도 연구생들과 바둑공부를 한다. 모르거나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격의 없이 묻고 공부한다. 공자의 불치하문이다. 그의 소탈하고 자신을 낮추며 끊임없이 배우고자 자세는 바둑뿐 아니라 다른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귀한 모델이 아닐 수 없다. 바둑에서 30세만 넘으면 기재가 한풀 꺾이고 노인 소리를 듣는 마당에 서봉수 명인이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바둑이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지만 3, 40년 전에는 일본이 대세였다. 바둑 꿈나무들이 일본으로 바둑을 배우러 유학을 갔다. 김인, 조치훈, 조훈현, 하찬석, 윤기현 등 초창기 바둑의 대중화에 기여한 다수의 기사들이 일본 유학파였다. 당시 바둑 영재들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킬 스승도 없었고 시설도 요원했다. 요즘엔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조기유학을 오고 있다. 일본 출신의 바둑 영재들이 우리나라에서 공부한다. 일본의 여자 바둑 천재 스미레가 대표적이다. 바둑은 중국이 원조이다. 중국은 아예 대표선수들을 발굴하여 체계적으로 훈련을 시킨다. 중국과 한국의 바둑 실력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선수층은 중국이 훨씬 두텁다. 우리나라 역시 국가대표를 선발하여 소수정예의 엘리트 훈련을 시키고 있다. 


알파고와 같은 AI가 등장하면서 바둑에도 많은 변화가 불고 있다. 먼저 바둑의 정석에 변화가 생겼다. AI 정석이 등장했다. 과거 잘못 두었다고 스승에게 혼쭐났던 수를 AI는 높게 평가한다. 바둑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있다. 기사들은 대국 후 AI와 복기를 하고 AI와 함께 바둑을 둔다. 바둑이 인간 대 인간의 대국이 아니라 인간 대 기계의 대국으로 변천하고 있다. 하기야 딥러닝을 하는 AI를 이길 프로기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AI는 강해진다. 몇 해 전 이세돌 기사가 알파고를 상대로 1승을 거둔 것이 인간의 유일한 승리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AI 하고는 2점을 놓고 두어야 균형이 맞을 정도다. 흥미로운 관점 포인트는 TV 바둑 대국이다. 대국을 중계하면 진행을 하는 캐스트와 해설을 하는 전문기사가 등장하는데 전문기사의 역할이 제한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인간이 해설을 하고 수를 예측하는 것보다 AI 예측을 참고하여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는 것이다. 과거 해설 담당 기사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비하면 AI 시대의 해설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바둑이란 무엇인가? 서봉수는 "점을 이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수의 명쾌한 정의다. 반상에 놓인 바둑돌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지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인생도 초, 분, 시간 단위를 이어나가는 활동이다. 바둑의 이치와 같은 맥락이다. 또 있다. 일류기사나 평범한 아마추어 바둑애호가이거나 똑 같이 적용되는 바둑룰은 '두 점을 내지 않으면 죽는다'이다. 아무리 기발한 수를 잘 발견하는 고수라도 자신의 바둑이 두 점을 내지 못하면 죽는 돌이 된다. 사람도 두 집을 내야 한다. 한 집은 신체가 건강해야 한다. 다른 한 집은 정신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한 집만 내게 되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바둑의 묘미는 '패'에서 나온다. 패는 일종의 패자부활전이라고 생각한다. 다 죽었던 돌들이 패를 통해 기사회생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경우가 있다. 바둑을 잘 둔다는 것은 패를 잘 만들고 잘 활용할 줄 아는 것이다. 패를 즐겨하다 패가망신 경우도 있다. 패를 만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패 감이 없다면 상대방에게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패 감을 확인하고 패를 만들었을 때 부활할 기회가 생긴다. 그럴지 않으면 부활은 없고 패자만 될 뿐이다. 바둑은 전체적인 균형 감각과 판세를 읽을 줄 아는 분별력, 판단력, 예측력, 결정력이 필요한 법이다. 


깨달은 바둑의 이치가 있다. 나도 실수하지만 상대도 실수를 한다는 점이다. 누가 더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 않느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강태공이 무왕을 기다리듯이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가 실수가 하게 된다. 실수를 알아채리는 수준이면 고수다. 프로기사도 마찬가지로 실수를 한다. 종국 뒤에 복기가 필요한 이유다.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복기를 통해 피드백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람 역시 실수한다. 실수를 하니까 사람인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없다. 실수를 통해 성장한다. 실수를 알아채리지 못할 때 깨우쳐 주는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나에게 바둑은 단순한 취미 그 이상이다. 바둑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바둑은 교만하거나 욕심을 부리면 절대 이길 수 없다. 혼자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수를 존중하고 왜 그 수를 두었든가를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좋은 수를 찾아낼 수가 없다. 상대가 고사리 손의 어린이거나 백발의 노인이거나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가끔 반상을 어지럽히거나 거칠게 착점 하는 상대가 있다. 나의 정신을 흔들어 혼란에 빠트리는 상대의 전략이다. 흥분하여 덩달아 따라 두면 반드시 지게 된다. 바둑은 고도의 정신 수양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면 지게 된다. 자기만의 바둑을 둘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사는 고유한 방식이 있는 것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바둑을 두어야 한다. 자신의 바둑을 두고 지면 후유증도 훨씬 덜하다. 


지금까지 온오프라인에서 족히 만 번은 두었을 것이다. 한 가지 일에 만 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로 성장한다는 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만 번이면 한 판에 1시간을 잡더라도 만 시간에 해당한다. 나는 전문기사로 성장할 만큼 기재도 없지만 그만큼 직업으로서 바둑을 두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즐기는 취미요 정신수양 차원의 시간이었다. 


바둑 철학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바둑만큼 나비효과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경기도 없을 것이다. 초반의 한 수가 중후반에 어떤 날갯짓을 할지 모른다. 바둑이란 내가 놓은 한 수의 가치와 상대가 놓은 한 수의 가치를 따져 의사 결정하는 능력이 중요한 이유다. 바둑에 임하는 자세는 '누가에게나 질 수 있지만 쉽게 지진 않는다'이다. 나약하게 무너지지 않겠다는 단호함이다. 나약한 사람은 '진정한 신념과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믿는다. 질경이처럼 질기게 둔다. 바둑에 임하는 자세는 곧 나의 삶의 방식으로 승화돠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승패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게 즐기면서 나만의 바둑을 둘 수 있다. 물론 승률도 덩달라 올랐다. 종국 후에는 승패에 관계없이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라는 문자를 남긴다. 바둑만큼 나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없다. 바둑을 통해 세상은 절대 혼자 살 수 없으며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를 알 때 나 역시 수를 낼 수 있다는 겸손함을 배운다. 바둑은 친구이고 멘토이다. 바둑에는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이 담겨있다. 바둑 고수는 감정들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다. 전문기사는 포기했지만 바둑의 윈리에 대해 조금 알게 되어 만 시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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