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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09. 2021

삼국지 인물 재발견

③ 유비 휘하의 제갈량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자는 공명(孔明)이며 별호는 와룡(臥龍) 또는 복룡(伏龍)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은 없을 것이다. <삼국지연의>, 즉 소설 삼국지에는 공명의 신기에 가까운 예지력과 통찰력이 있기에 삼국지를 한번 붙들면 밤을 새워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국 고대사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나타났지만, 공명이야말로 도덕성, 인품, 충의, 지모, 균형감각, 역사의식 등 영웅에게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갖춘 영웅 중에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공명에 대한 이야기를 일일이 나열하기는 수십 쪽을 할애해도 부족할 정도이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도 <촉서>에서 제왕과 제후에 이어 공명만을 위해 별도의 <제갈량전>을 기록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진수는 위나라 조정에서 역사편찬 작업에 참여하여 제갈량이 한 말이나 포고, 편지, 상주문을 엮어 24편의 <제갈씨집> 문집을 만들었다. 위나라에서도 제갈량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뭇사람들이 공명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전략과 전술을 생각해내는 유비의 군사(軍師)로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제갈량을 정치가, 발명가, 충절지사, 관료 등 네 가지의 다른 관점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첫째, 제갈량은 시종일관 청빈을 실천하고 가족과 친인척들을 잘 관리한 불세출의 정치가였다. 공명이 북벌 중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기 전 황제 유선에게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렸다. "성도에는 뽕나무 8백 그루와 메마른 땅 열다섯 이랑이 있으므로 제 자손의 생활은 이것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특별히 조달해줄 필요가 없고, 몸에 필요한 옷과 음식은 모두 관부에서 대주므로 다른 산업을 경영하여 재산을 만들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만일 신이 죽었을 때 저희 집안에 남는 비단이 있게 하거나 밖에 다른 재산이 있게 하여 폐하의 은총을 저버리게 하지 않겠습니다."(진수 2018, 128).


삼국지에는 공명의 가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공명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둔 엄연한 가장이었다. 공명은 207년 삼고초려로 유비의 최측근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생애를 마친 234년까지 무려 27년간 국가 최고위직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뽕나무 8백 그루와 땅 열다섯 이랑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공명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인척의 부를 축적하거나 출세시키는 데 사적으로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명은 임종할 때 한중의 정군산에 묻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산에 의지하여 무덤을 만들되 무덤은 관을 넣을 수 있을 정도로만 하며, 염할 때는 평소 입던 옷으로 하고 제사 용품은 쓰지 못하게 유언했다. 그의 청빈한 삶은 관직에 나아가기 전이나 나간 후나 죽을 때까지 일관되었다.


진수는 문집 <제갈씨집>에서 공명의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춘추시대 제나라의 관중과 한나라의 소하에 비길만하다고 평가했다(진수 2018, 132). 그러나 진수는 "공명은 기발한 계략을 발휘하는 면에 약점이 있고, ... 임기응변하는 군사적 전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허쯔취안 2019, 24)"고 평가하였다. 공명이 불세출의 정치가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략가로서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지 못했다는 지적한 것이다. 이런 평가는 공명이 성격이 과격하거나 자부심이 강하거나 승벽(勝癖)이 지나친 사람을 기용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해본다. 사람을 기용하는 도량은 유비나 조조에 이르지 못했다.


나는 공명의 신중한 용인술이 이해된다. 최고 의사결정자가 아닌 2인자의 입장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고 돌다리도 두드리듯 신중하게 천거를 하거나 기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명은 위연에 대해 완벽한 신뢰를 주지 않고 마음속으로는 경계를 했고 언젠가는 변심할 사람으로 생각했다. 실제 위연은 공명 사후에 반란을 도모하다 실패하지 않았던가. 공명이 꼭 필요한 인재를 기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제갈량은 창의적 사고를 가진 발명가였다. 공명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상황을 창의적 사고와 발명으로 극복했다. 한 발씩 장전하여 쏘는 화살의 한계를 벗어나 연발식 쇠뇌를 만들었고, 산비탈의 좁은 협로를 이동할 수 있는 목우유마를 발명하였다. 공명 수차례 걸친 북벌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과제 중에 하나는 군량 보급이었다. 촉의 성도에서 군량을 우마차에 싣고 북쪽 위나라 지역까지 수송한다는 것은 난제 중에 난제였다. 천리길의 동선이었다. 아마 공명이 군량미만 제대로 보급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당시 전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셋째, 제갈량은 인간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충의지사였다. 유비는 임종을 앞두고 이런 유언을 남긴다. "그대의 재능은 위나라 조비의 열 배는 되니 틀림없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는 큰일을 이룰 것이오. 만일 후계자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시오." 나는 유비의 유언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공명을 떠보려는 유비의 가짜 유언이 아닐 것이다. 유비의 유언에 공명은 이렇게 답한다. "신은 감히 온 힘을 다하여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가겠습니다." 공명은 유비와의 약속과 다짐을 평생 지켰다. 유선은 공명이 죽었을 때 시호로 충무후(忠武侯)를 제수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공과 겹친다. 공명의 충과 의는 한 사람의 주군과 한 국가를 위해 일관되게 지켜졌다. 이는 위나라 사마의가 군사작전 수행에 필요한 지모가 뛰어나 조조에게 많은 공을 세웠지만, 결국 반란으로 권력을 탈취하고 그의 자손들이 위를 없애고 진나라를 세운 것과는 여러모로 대비가 된다.


제갈량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제위를 넘보거나 부를 축적하거나 자식이나 친인척을 출세시킨 적도 없다. 그는 자신의 주군에게 시종일관 충과 의를 실천했다. 바로 이점에서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을 위대하게 여기는 것이다(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2003, 178-179).  


넷째, 제갈량은 상과 벌이 분명한 관료였다. 공명은 친자식처럼 아끼던 마속을 눈물을 흘리며 죽였다(揮淚斬馬謖). 벌을 주는데 친소관계를 봐주지 않았다. 공명은 잘못한 사람을 처분하는 데 멈추지 않고, 그 사람을 골라 쓴 자신에게도 벌을 달라는 소를 황제에게 올린다. " 신은 미미한 재능으로 맡은 일을 해낼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여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러 나갔으나 (중략) 실책을 범했습니다. 그 책임은 모두 신이 사람을 부당하게 쓴 데 있습니다. 신은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없으며 일을 처리함에 어두운 면이 많습니다. (중략) 청컨대 신이 스스로 직위를 세 등급 낮추어 그 책임을 지게 해주십시오(진수 2018, 125)." 공명은 스스로 마속과 연대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인물을 보기 드물다.


공명은 진실한 마음과 공정한 태도로 법에 의거하여 업무를 처리하고 상벌을 분명하게 집행했다. 그래서 공명에게 처벌을 당한 사람도 그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명이 북벌을 단행할 때 군량 보급의 책임을 맡았던 이엄의 경우 군량을 제대로 보급하지 않아 군사작전에 막대한 차질을 빚어 신분을 평민으로 강등하여 유배당하였지만 공명의 공평한 인사 처리에 불만이 없었다(허쯔위안 389-390).


종합하면 제갈량은 불세출의 정치가, 행정관료이면서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명대 나관중이 <삼국지 연의>에서 제갈량을 미화하거나 우상화하기 위한 창작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2003, 31). 이는 앞에서도 설명한바와 같이 명대에서는 한(漢)의 정통성을 촉한(蜀漢)으로 설정하면서 제갈량뿐 아니라 촉한의 인물 모두를 미화시킨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제갈량에 대한 의도적 과대 포장이나 거품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8세기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영회고적오수(詠懷古跡五首)>에서 제갈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인은 제갈량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공명의 큰 이름 고금천지에 남아 있으니/ 종신의 남긴 자취 엄숙하고 창고하네/ 천하삼분의 계책을 생각했으나/ 만고의 높은 지위도 한 가닥 우모였네/ 이윤 여상과도 백중을 가리기 힘들며/ 계획대로 되었다면 소하 조참도 어림없는 일/ 한실의 제위를 회복할 수 없는 천운이 밀려와서/ 뜻을 세우고도 죽은 것은 군무의 피로 때문이었다. (최명 1994, 130).


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2003). <삼국지 해제>. 김영사.

진수. ( 2018). <정사 삼국지-촉서>. 김원중 옮김. 휴머니스트.

최명. (1994). <소설이 아닌 삼국지>. 조선일보사.

허쯔취안. (2019). <위촉오 삼국사>. 최고호 옮김. 역사 모노그래프.

드라마 <삼국지>(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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