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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Sep 28. 2021

삼국지 인물 재발견

④ 조조 휘하의 사마의

사마의(司馬懿 179-251)의 자는 중달(仲達)이다. 사마의는 유교적 교양을 갖춘 박학다식한 사대부 지주 출신으로 처음에는 환관 출신인 조조 휘하에서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왕조의 국운이 다했다고할지라도 사대부의 후예로서 몸을 낮춰 환관의 자손인 조조 밑에서 벼슬을 할 생각이 없었다(왕우 2011, 16). 조조가 승상(오늘날 국무총리)으로 있을 때 엄포와 압력을 받아 마지못해 벼슬을 시작했다. 조조는 사마의의 외모가 낭고상(狼顧相), "눈초리는 매와 같고 용모는 승냥이(늑대) 같다"라고 하였다.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얼굴을 뒤로 돌릴 수 있는 늑대의 특성을 빗댄 말이다. 조조는 사마의가 영웅의 기개와 정치적 야심을 숨기고 있다고 판단하고 끝없이 의심을 했다. 그래서인지 조조는 생전에 사마의에게 병권을 맡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마의는 뛰어난 전략가로 행정가로서 두각을 나타내 조조가 위나라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많은 공을 세웠고, 조조 사후에는 위의 문제(조비), 명제(조예), 제왕(조방) 등 3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위 문제(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에는 돈독한 신임을 받았다(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2003, 424-425). 


사마의는 특별한 외모와 뛰어난 지략 때문에 조씨 가문에 의해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조조가 죽기 얼마 전에 세 마리의 말이 한 구유(槽:조씨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었는데 매우 꺼림칙했다. 그래서 태자 조비에게 "사마의는 남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틀림없이 너의 집안일(즉, 국가의 일)을 간섭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태자(조비)가 평소 사마의와 친분이 깊어 매번 사마의를 온전히 도와주었으므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허쯔취안 2019, 473). 세 마리의 말은 위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게 하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후세 사람은 그 꿈을 해석하는 시를 지었다. "세 마리 말이 한 구유에서 먹으니 그 일이 이상하구나/ 그러나 아무도 진나라 기반이 움텄음을 모르네/ 조조의 간특한 꾀도 헛것이구나/ 조정에 사마사 있음을 어찌 알았으리오."(최명 1994, 434). 사마사는 사마의의 큰 아들이다. 


사마의는 후흑()의 최강자이다. ‘면후()’와 ‘심흑()’을 합성한 후흑은 면후는 뻔뻔함과 음흉함을 의미한다. 사마의가 후흑에 있어 최강자의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지모를 견제하고 시기질투하는 세력이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후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조조조차도 사마의에게 속아 넘어갔으니 말이다(최명 1994, 433-434). 사마의는 행동에 옮기기 전에 확실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엄청난 인내의 소유자다. 자신의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외형적으로는 완벽한 충신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2003, 425-426). 드라마 삼국지를 보면 사마의가 정권 탈취를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까지 얼마나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가에 대해 알 것이다. 조상과 권력 다툼을 할 때는 2년 내내 꾀병을 앓아 상대를 완전히 방심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완벽하게 연기를 하였던지 염탐하러 갔던 조상의 측근들은 "사마의는 시체처럼 누운 채 겨우 숨만 쉬고 계십니다. 육신과 정신이 이미 분리되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라고 보고할 정도였다(허쯔취안 2019, 499-500). 한번은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 때, 의심 많은 조조가 사마의의 병이 진짜인지를 확인할 목적으로 자객을 사마의 침실로 보냈다. 사마의는 조조의 의도를 미리 간파하고 자객이 사마의의 얼굴에 칼을 드리대었어도 중풍 환자처럼 눈을 떠 자객을 바라보았다고 한다(왕우 2011, 16-17).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춰 밖으로 새지 않도록 하면서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는 의미로 사마의가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해석됨)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친타오 2020, 213-214). 도광양회는 중국 등소평(1904-1997) 주석이 중국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대외 마찰을 피하고 국내적으로 힘을 기르자는 취지의 대외정책기조였다.  


사마의를 제갈량과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군사 전략면에서 제갈량이 공격에 능하다면, 사마의는 수비에 능했다. 한마디로 용호상박의 호적수요 막상막하다. 제갈량이 좀 더 오래 살면서 사마의와 싸웠다면 중국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제갈량이 유비 사후 6차례에 걸쳐 북벌(227-234)을 단행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게 된 것은 사마의의 수비 전략에 막혀서이다. 사마의는 촉의 제갈량이 신기(神技)에 가까운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고 용맹한 장수들이 있다고 해도 식량이 떨어지게 되면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수비 위주의 지구전 전략에 번번이 막히고 만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사마의는 이탈리아 축구가 전성기 시절 보여준 빚장 수비 전략을 견지했다.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를 이긴다'라는 말도 있지만, 제갈량이 234년 오장원에서 죽게 되면서 최후의 승리는 사마의에게 돌아간다. 


사마의는 뛰어난 식견과 창의적 사고를 소유한 인물로 후한과 위나라의 관료로 4 대에 걸쳐 정치, 군사, 경제, 행정 등 여러 면에서 혁혁한 공을 쌓았다. 그러나 249년 정변을 일으켜 위 황제(조방)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의 충과 의의 색깔은 변했다. 결국 손자 사마염이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면서 진(晉)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사마의는 진(晉)의 고조로 추존되었다. 사마의는 조조가 후한 헌제를 옹립함으로써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즉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면서 천하쟁패의 명분을 확보하였던 것과 유사한 정권 탈취의 전철을 밟았다. 후세 사가들이 사마의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은 아마도 이 부분일 것이다. 자신이 충성을 다해 섬겼던  주군 조조를 경계했으면서도 고스란히 조조와 그 후손들이 했던 전철을 따라 했던 것 말이다. 이러다보니 명대에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서는 위, 촉, 오나라 삼국 중 한(漢)을 이을 정통성을 촉에 두다 보니 조조를 따른 사마의에 대해서는 조조처럼 음흉하고 간사한 후흑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다. 반면 촉의 제갈량에 대한 기록은 상당 부분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은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이지만, 그 기록의 주체로서 사가(史家)들이 역사를 어떤 기준과 관점에서 기록할 것인가는 더 중요하다 할 것이다. 


왕우. (2011).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남영택, 이현미 옮김. 한얼미디어.

장정일, 김운회, 서동훈. (2002). <삼국지 해제>. 김영사.

진수. (2018 ). <정사 삼국지>. 김원중 옮김. 휴마니스트. 

최명. (1994). <소설이 아닌 삼국지>. 조선일보사. 

친타오. (2020). <결국 이기는 사마의>. 박소정 옮김. 남양주: 더봄.

허쯔취안. (2019). <위촉오 삼국사>. 최고호 옮김. 역사 모노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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