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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02. 2021

메르켈 리더십

 협치의 리더

세계 정치사를 보면 정치인이 그것도 지역구를 대표하는 국회의원도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재집권의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 일이다. 현실은 오히려 연임을 가로막는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집권을 계속하고 싶은 것이 정치이고 정치인이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규정을 바꿔서라도 종신에 가까운 집권 기회를 열어놓고 있지 않은가. 정치판에서는 좀 더 오랫 동안 정부를 이끌어갔으면 하는 리더들은 그만두고, 제발 물러났으면 하는 리더들은 좀체 물러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결단은 '나 아니면 절대 안된다'는 유아독존의 아집과 교만이 판치는 정치에서 신선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2021년 9월 16년 만에 총리직을 내려놨다. 최근 메르켈 총리에 대한 여론 조사를 보면 무려 70% 이상의 응답자가 그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퇴임하는 지도자에 대해 이렇게 높은 긍정 평가를 내린 경우는 찾아보기 드문 사례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재임 2005.11.22~2021.12.7)가 헬무트 콜(재임 1982.10.1~1998.10.27) 총리와 함께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남긴 것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유산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의사결정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과묵하고 참을성 있는 메르켈은 이견을 듣고 조율하고 합의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말수가 적고 인내심이 강한 건 비밀경찰의 감시가 심했던 동독에서의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경험이 '이견을 견디는 근육'을 키웠다는 것이다(강인선 2021). 고난과 고통으로 담금질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성숙한 법이다.


그녀는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팩트를 먼저 따져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렸다. 극단을 배제한 합리적인 이러한 의사결정방식은 그녀가 16년 동안 총리로 일하면서 2008년 금융위기, 2011년 탈원전 전환, 2015년 시리아 난민 문제, 2020년 이후 코로나 19의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국내외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의사결정방식은 그녀가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정치인으로 활동하기 전 연구소에서 물리학자로 일했던 경험들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과학자가 정치인으로 변신했지만 사고와 의식 구조는 자연과학적인 알고리즘에 잘 훈련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케이티 마튼 2021).  


독일식 선거제도는 우리나라에서 선거제도를 고칠 때마다 가장 닮고 싶은 제도라고 한다. 독일식 선거제도란 무엇인가? 독일식 선거 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혼합한 방식으로 어느 한 정당이 단독으로 정부를 구성하기 어려운 구조다. 정당들은 협상을 통해 연립 정부(연정)를 구성하는게 일반적이다. 의원수의 과반을 채우지 못한 정당들이 합종연횡으로 연정을 할 수밖에 없다. 좀더 구체적으로 독일선거제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독일선거제도는 한마디로 유권자의 표심을 사표로 만들지 않고 실제 의석으로 공정하게 반영하게 만든다는게 핵심이다.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두 표를 행사하는데, 지역 선거구 후보와 정당을 찍는다. 의원 정수는 지역구 299석, 비례 299석 등 총 598석이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 수가 동일한 것이 인상적이다.


지역구에서 다수 득표자가 당선되고,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각 당의 총 의석수가 배분되는 것은 우리나라 선거제도와 동일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역구 후보와 비례대표 후보는 중복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역구에서 낙선하더라도 비례대표 후보로 연방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 개인의 득표력도 중요하지만, 소속 정당의 득표력도 중요하게 여기는 선거문화 때문이다. 이렇게함으로써 소속정당의 지지도가 열세인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도 소속 정당의 득표를 높이기 위해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독일선거제도의 또 다른 특성은 전체 의석은 598석이지만 만약 정당에 배정된 의석보다 정당의 지역구 당선자가 많을 경우 초과 당선자도 추가로 인정하는 초과의석 제도, 즉 보정의석이 생기게 된다. 최대한 유권자의 인물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서다. 독일선거에서 의원정수가 늘어나는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유권자의 표심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본다. 단서조항도 있다. 군소정당의 난립을 막기 위해 정당이 의석을 배분받으려면 최소한 5% 이상의 득표율을 보여야 한다.


보수우파 정당에 소속한 메르켈은 지난 16년 동안 정당들 간의 연정을 통해 총리직을 수행했으며, 그런 가운데 좌파의 진보적인 정책도 수용하는 것을 주저치 않았다. 진영의 논리라든지 개인의 소신이나 신념보다는 국가 미래와 국론의 관점에서 의사결정을 내렸다. 메르켈 총리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에서 원전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탈원전 친환경 에너지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본래 메르켈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반대했다. 탈원전의 훼방꾼이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그 과정은 대강 이렇다. 2000년 슈뢰더 총리는 향후 20년간 원전 19개 전부를 단계적으로 폐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05년 임기를 시작한 메르켈 총리는 이전 정부에서 발표한 원전 폐쇄 시한을 2020년까지 연기하기로 했다. 이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기조를 번복했다. 여기까지는 국민과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하는 정치인과 똑같다.


그런 와중에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고 독일에서 탈원전이 다시 정치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메르켈 정부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메르켈 정부는 2022년까지 전체 원전 가동을 중단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메르켈 정부의 곤이지지(困而知之) 형국이다. 개인이나 정부도 곤란한 형편을 당하고 나서야 깨닫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정치에서 더 큰 문제는 곤란을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도자나 정부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독일은 유럽에서도 탈원전 친환경에너지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반면교사로 삼아 그 의사결정과정에 따른 다양한 요인과 변수들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처한 환경과 문화 그리고 국민의 요구와 미래의 필요성 등 수많은 요인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메르켈 총리의 국가통합 의지와 실천에 대해 소개할 행보가 많지만 이것은 꼭 쓰고 싶다. 그는 독일의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상기시키면서 신나치주의 확산 등 민족주의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2013년 8월 20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뮌헨시에서 약 16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 묵념했다. 역대 총리들은 이곳을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2010년에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호르스트 쾰러)이 방문한 적은 있었다. 정치적 실세인 총리가 방문할 경우 유권자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과거 행동을 보면 유권자를 의식해서 그의 소신을 꺽지 않았다. 1992년 여성청소년부 장관 시절에도 다하우 수용소에 헌화했고, 2008년 이스라엘 방문 시에는 유대인 학살추모관을 찾아가 사죄했다. 외국 대통령이 방문하면 수용소로 안내하여 과거사에 대해 사죄하곤 했다. 그는 "우리는 나치가 자행한 범외와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 그리고 대학살에 영원한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다(이상언 2013). 독일 총리로서 피해자와 패해국에게 과거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철저히 낮은 자세로 용서를 구했다. 지도자는 쉽지 않은 일을 솔선수범하여 하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임기를 마무리할 때 그를 평가하는 항목 중 국가 경제에 대한 성적표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메르켈 총리 재임시에 독일 경제는 어땠을까? 메르켈이 총리로 취임한 2005년 독일 경제는 동맥 경화증을 앓는 유럽의 환자에 비유되었다. 메르켈은 16년 동안 총리로서 재임하면서 독일 경제를 유럽의 기관차로 다시 달리게 했다. 현재 실업률은 세계 최저 수준인 3%로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다. 2020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이 가장 행복한 국가로 나타났다. 그리고 공(功)을 슈뢰더 전임 총리에게 돌렸다. 슈뢰더는 자기 소속 정당이 아니라 경쟁 상대 정당 소속의 총리였다. 권력 쟁취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상대방에게 공을 돌린다. 국가 경영에서 나타나는 성과는 당대에 자기 혼자 잘해서 좋은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씨앗을 뿌리 사람이 있고 열매를 따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정치가 이념과 진영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국민이 보이고 품격있게 된다. 이 정도의 정치라면 삼류라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메르켈 총리의 정치적 후원자는 헬무트 콜 총리였는데, 콜과 메르켈은 나란히 16년 간 총리로서 임기를 마쳤다. 메르켈이 자발적으로 총리 출마를 포기한 것은 정치적 스승인 콜 총리보다 더 오래 총리를 하는 것이 부담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만의 생각일 수 있지만 메르켈의 인품이라면 그런 가정도 가능하다고 본다.


메르켈 총리는 총리가 된 뒤로도 직접 시장을 보았다. 총리라는 지위 이전에 퇴근 후에는 가정에서 살림하는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간다. 공과 사의 경계가 분명하고 그 경계를 표나지 않게 옮겨다닌다. 성숙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정치인의 품격이다. 헐리우드 액션과 분식에 능수능란한 한국 정치인에 비하면 참 부러운 모습이다. 정치인 메르켈은 홍보용으로 한두 번 보여주기 식의 쇼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퇴근 후에 마트에 들려 시장을 보고 집에서 요리해서 식사를 한다. 권위를 내려놓으면 권위가 더 올라가기 마련이다. 영어로 권위는 오소리티(authority)라고 한다. 발음이 오소리(吾小利)와 닮았다. 오소리, 즉 내가 이익을 적게 취하게 되면 오소리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오소리와 오소리티는 반비례한다.


10월 3일은 우리나라에서는 개천절이지만, 서독과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으로 통일이 된 날이기도 하다. 2021년 10월 3일 <통일 31주년 기념 연설>에서 메르켈 총리는 통일의 교훈에 대해 이렇게 연설했다. "서로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사람들과의 다름을 용인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살아온 길과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이 통일 31주년의 교훈이다." 통독 31년째가 된 현재 서독과 동독의 지역 간 경제 격차와 사회 갈등으로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기준 1인당 GDP는 서독 지역이 4만 3449유로(약 5975만원) 반면에 동독 지역은 서독의 69% 수준인 3만 27유로(약 4130만원)였다. 실업률에서도 서독은 5.1%, 동독은 7.1%로 나타났다. 독일 500대 기업 본사의 지역 분포를 보면 서독 지역에는 93%(464곳), 동독 지역에는 7%(36곳)에 불과했다. 이러다보니 동독인들은 '차별받는 2등 국민"이라는 불만을 터트리고 있고, 반면 많은 서독인들은 "서독인들의 희생으로 공산권이던 다른 동유럽 나라 국민들보다 훨씬 잘살게 됐는데 왜 불만을 갖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손진석 2021). 메르켈은 통독 이후 지역 격차와 구동독인과 구서독인 간에 드러나는 현실 인식의 차이를 보면서 심정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녀는 통독 후 최초의 구동독 출신 총리가 아니던가. 


최장수 독일 총리의 통일에 대한 소회를 들어보자. "통일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통일로 인해 적지 않은 동독인이 정치와 직업 세계 등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고, 일부는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놓이는 상황이었다"(손진석 2021). "오늘날 우리는 통일된 조국에서 민주적 자유가 선사한 기회들의 열매를 누리고 있지만, 동독 공산독재를 경험한 나 개인으로는 분열의 종식과 민주주의는 언제나 각별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고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매일 노력해야 한다"(이유정 2021). '통일은 아직 미완성이고 민주주의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메르켈의 연설은 16년간 독일과 유럽을 이끌고 퇴임하는 그녀의 독일 사회가 처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진단이 아닐까 싶다. 통일 독일에서 일어난 사례, 즉 지역격차의 문제, 극우세력의 등장, 사회적 갈등 등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남북 통일 후 우리 사회에서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교훈과 적절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연합(EU)은 27개국이 회원국인데 이중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국가는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4개국이다. 가정의 형제들이 많아도 맏형이 가정사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독일 역시 유럽 연합에서 맏형처럼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2021년 1월 1일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서 이제 EU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지구촌은 코로나 팬데믹, 기후위기, 민족주의 준동과 지역 분쟁, 미중의 패권 경쟁 등 바람 잘날 없을 정도로 난제가 얽혀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있는 갈등(葛藤)의 양상이다. 합리적 리더십으로 타협하고 정적까지 포용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이견을 조정해가는 메르켈 리더십이 벌써 그립다. 독일 국민이 그녀를 무티 메르켈(Mutti Merkel 메르켈 엄마)로 부르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케이티 마튼. (2021). <메르켈 리더십: 합의에 이르는 힘>. 윤철희 옮김. 모비딕북스.

강인선. (2021). <조선일보>. <메르켈 총리는 왜 사생활 노출을 꺼렸을까>. 10월 15일.

강천석. (2021). <조선일보>. <대통령 닮지 않은 분을 찾습니다>. 10월 2일.

서유진. (2020). <중앙일보>. <[후후월드]코로나로 지지율 79% 반전···EU가 흉보던 '메르켈 신드롬'>. 7월 23일.

손진석. <2021>. <獨 통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떠나는 메르켈의 우려>. 10월 5일.

이광빈. (2017). <연합뉴스>. <국내 선거제도 개혁 화두의 '만년 모델'…독일식 선거제도란>. 9월 25일.

이광빈. (2021). <연합뉴스>. <탈원전 훼방꾼이었던 메르켈, 자의로 변했을까>. 9월 18일.

이상언. (2013). <중앙일보>. <유대인 학살 현장 찾은 메르켈 "슬픔과 부끄러움이 ...">. 8월 22일.

이유정. (2021). <중앙일보>. <16년간 유럽 이끈 메르켈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아">. 10월 5일.

임상훈. (2021). <오마이뉴스>. <메르켈이 보여준 정치의 품겨, 국민은 왜 열광했나>. 10월 2일.

한주연. (2021). <한겨례>. <메르켈의 합리적 리더십은 독일 정치문화가 됐다>.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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