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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Oct 12. 2021

아! 비잔틴 제국

역사의 흥망성쇠는 반복한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서기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현재의 터키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비잔티움(Byzantium)은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꿔 불렀다. 비잔틴 제국은 비잔티움에서 유래했고 역사가들은 이 제국을 동로마라고 부른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알려면 로마의 역사로 거슬러가야 한다. 로마 제국은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하고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서로마 제국(395-476)은 멸망한다. 반면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천년 이상(395-1453)의 역사를 지속하였다. 1453년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로마 제국은 건국 이후 2200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진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은 지정학적으로 동서양의 교차로이자 실크로드의 최종점, 기점에 해당한다. 지도를 보면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로 구분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보스포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발단은 늘 제우스다.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Io)를 사랑하게 된 제우스는 아내 헤라를 속이기 위해 이오를 하얀 암소로 둔갑시킨다. 이를 알아채린 헤라는 쇠파리떼를 동원해 이오를 괴롭힌다. 무자비한 쇠파리떼의 공격으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이오(하얀 암소)는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오는 이오니아 해를 건너고 보스포로스 해협을 횡단했다. 그래서 보스포로스는 '암소의 여울'이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불핀치 2016, 63). 현실 세계에서 보스포러스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보스포러스와 발음이 비슷한 터키어는 보아즈인데 그 뜻은 '목구멍'이라고 한다. 이 해협이 흑해(머리)와 지중해(몸통)를 연결하는 목구멍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한다(김형오 2014).


<보스포러스 해협>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전통과 이념을 계승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리스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야말로 서양문명의 발원지인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적 융합이 이뤄진 곳으로 동서양 문화가 교류하며 종교와 문화, 역사를 주도하였다.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던 비잔티움은 지식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학문 및 지식이 연구되고 보존된 곳이었다. 비잔티움의 주석가와 필경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학문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비잔티움은 기독교 신앙으로 신성화된 그리스와 로마의 계승자였다(스티븐 런치만 2004, 286 재인용).


인류 역사에서 단일 제국이 천년 이상을 지속한 경우는 비잔틴 제국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 신라(BC 57-AD 935)도 거의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속했다. 장구한 역사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비잔틴 제국은 500번이 넘는 전쟁을 치르고, 20여 차례의 도성 직접 공격에도 꿋꿋하게 버텨냈다.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그런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오늘날 터키)에 의해 멸망되었다. 군사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결정적 한방은 가공할 대포다. 그 대포 이름은 '우르반(Urban) 대포'다. 천년 이상을 끄떡하지 않고 버티던 비잔틴 제국이 신종 대포에 무너진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거대한 성채로 413년 축조되었는데 건설 당시 황제 이름을 따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으로 부른다. 해자(물), 외성, 내성 등 너비만도 58-63미터의 삼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구조로 축조되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20.8km이다. 해자는 깊이 10m, 폭 20m로 위기가 닥치면 그 안에 물을 채웠다. 외성은 2m 두께에 높이가 8.5m이며 96개의 방어탑이 설치되어 있다. 내성의 높이는 바깥쪽에선 9.3m이고, 도시 안쪽 기준으로는 13.2m이다. 두께는 4.7m 이상으로 웬만한 대포알로는 뚫을 수 없었다(김형오 2014, 384-397).


<테오도시우스의 성벽>


인연이 역사를 만든다. 헝가리 출신 우르반은 대포 기술자로 오스만 제국의 침략 1년 전인 1452년에 비잔틴 제국에 자신이 제작한 거포를 제공하려 했지만, 비잔틴 제국은 우르반이 요구한 고액의 봉급을 감당할 수 없고 공성용 대포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바 있었다. 비잔틴 제국이 당시로서는 신형 대포에 해당하는 우르반 대포를 포기한 것은 오랫동안 수많은 침략에도 버텨온 튼튼한 성벽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르반은 비잔틴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군주 메흐메드 2세(재위 1444-1446/1451-1481)에게 찾아가고 메흐메드 2세는 우르반과 계약을 맺어 풍부한 자금과 재료를 지원한다. 우르반 거포는 길이 8m에 무게는 19t이다. 거포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사륜차 30대와 소 60마리, 사람 20명이 필요할 정도였다. 거포이다 보니 하루 이동 거리는 4km 정도이고 하루 7발 정도 발포할 수 있었다. 포를 장전하는데 무려 3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거포가 500kg의 돌 포탄을 날려 보낼 수 있는 최대 사거리는 1.6km이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가공할 핵무기급이다. 이러니 철옹성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견딜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대포의 공격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도시가 함락당한 사상 최초의 사례로서 근대 전투의 효시가 되었다(김경준 2016).

                                                              <우르반 대포>


비잔틴 제국이 함락되기 전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며 평화 관계를 유지했다. 오스만 제국 역시 몇 번의 침략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조공을 받는 것으로 비잔틴 제국과의 외교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릴 마음만은 굴뚝같았지만 난공불락의 성벽 때문에 감히 침략을 주저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술탄에 오르면서 국가의 모든 에너지를 비잔틴 제국의 함락을 준비하는 데 총동원하였다. 물론 우르반 대포를 제작하게 한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군사 전력은 비교 불가다. 비잔틴 제국은 5만 명의 시민과 7천 명의 군인이 전부인데, 이들 군인 중에서도 2천 명은 외국 용병이다. 테오노시우스 성벽의 총길이가 26km임을 감안하면 10m 간격에 1.5명씩 방어를 한 셈이다. 오스만 제국은 10만 병력으로 침략해 왔다(유민호 2019). 결과적 비잔틴제국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방어군을 확보하는데 절실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비잔틴제국은 수없이 많은 외부 침략을 겪으면서도 성벽으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설마 어떻게 되겠어하는 식의 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았을 때 교황과 이웃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한마디로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무엇보다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들은 비잔틴 제국이 이교도 군대와 비교할 때 방어군의 숫자가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고, 오스만 제국이 우르반 대포와 같은 신형 무기로 무장했다는 것도 몰랐다. 교황을 비롯한 대부분의 이웃 국가들은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군이 버텨줄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약 10여 일이 지난 6월 11일경이었다(스티븐 런치만 2004, 247-248). 비잔틴 제국이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버텨온 것처럼 이번에도 그렇게 될 줄 믿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453년 5월 29일,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당할 때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11세(재위 1449-1453)였다.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해 동로마 제국의 토대를 만든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가 로마 제국의 창시자 로물루스와 이름이 같은 것과 마찬가지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김현민 2019).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우르반 대포가 비잔틴제국을 함락시켰던 것처럼 이후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 때마다 등장하는 무기가 대포다. 유럽의 영국이 해양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것도 사실 대포의 성능 차이 때문이었다. 19세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중국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대포의 사거리 때문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에 23전 23승의 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대포가 큰 기여를 했다.


역사의 묘미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동과 서의 길목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유럽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함락은 아시아의 유럽에 대한 우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유럽의 경제적 번영의 근간인 동방무역, 즉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향신료·직물·도자기 등을 유럽에 판매해 이익을 얻는 무역활동이 전면적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는 교황청이 종교적, 세속적인 일에 일일이 간섭하다 보니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인 이슬람 국가와 교류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의한 비잔틴 제국의 함락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을 필두로 유럽인들이 대서양으로 눈을 돌려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교두보인 콘스탄티노플을 건너뛰고 대서양을 항해하는 장거리 무역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유럽이 다시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송병건 2014). 유럽인에게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여는 돌파구가 되었다. 이러니 역사는 강한 자의 편도 약자의 편도 아닌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역사는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는 자의 편이다.

시대: 15세기 길이: 8m 무게: 19000kg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인 메메트

        

김형오. (2014). < 술탄과 황제>. 파주: 21세기 북스.

불핀치, 토머스. (2016). <그리스 로마 신화>. 혜원.

런치만, 스티븐. (2004).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이노우에 고이치. (2014).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제국>. 이경덕 옮김. 다른세상.

김경준. (2016). <시사저널>. <(역사의 리더십) 오스만의 메메드 2세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다>. 7월 28일.

김현민. (2019). <아틀라스>. <오스만투르크 ①... 콘스탄티노플 함락하다>. 10월 10일.

송병건. (2014). <중앙선데이>. <[비주얼경제사] 비잔틴 천년제국의 최후 전투, 세계 경제를 뒤흔들다>. 11월 9일.

유민호. (2019). <월간중앙>. <53일만에 침몰한 '동로마 제국' 비잔틴>. 2월 28일.

<우르반 대포> 두산백과사전 https://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01011000609977

영화 <정복자 145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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