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철현 Dec 22. 2021

가끔은 시인처럼 살자

'멍 때리기'를 자주 해야 한다.

사전에서는 시인을 '시를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다. 사전에 의한 시에 대한 정의는 매우 협의적으로 규정하는 것 같아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이 정의에 의하면 시는 특정인의 전유물이 되어버린다. 조선 시대의 글깨나 읽었다고 하는 선비들을 보. 그들은 일상적으로 시를 짓고 시로 노래했다. 그들을 전문적으로 시를 짓는 시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의 시인에 대한 정의는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감정을 적절한 언어나 상징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누구나 마음에는 감정이 흐른다. 그 감정이 조탁을 거쳐 언어나 상징으로 표현되면 시가 되는 것이다. 광의적으로는 인간이 생산하거나 창조한 모든 예술 시 범주에 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수로 잘 알려진 밥 딜런은 음악 작사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자연은 시어(詩語)의 원천이고 최고의 시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에서 비롯되는 소리와 색깔은 시어 뭉치다. 인간은 자연의 소리와 색깔을 인간만의 언어나 상징으로 변환시켜 표현한다.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진보하여도 인간은 시인 '자연'의 시적 깊이를 이해하는 데만도 벅차다. 인간적 한계이다. 자연 앞에 겸허해야 하는 이유다. 기후재앙은 교만에 대한 작은 대가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간은 시인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표현하는 시어(詩語)는 갓난아기의 '응애' 소리다. 갓난아이가 모태에서 분리된 감정 덩어리를 표현한 최초의 언어이면서 함축어다. 그 소리는 생명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약속의 언어이면서 가장 인간적인 시어이다. 그 '응애' 소리는 성장하면서 폭발적으로 가지를 친다.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들은 자연의 소리를 듣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들은 소박하고 단순한 동심의 언어를 표현하지만 진실이 담겨있다. 어른들이 편견이나 집착으로 사실을 가공된 언어로 포장하여 표현한 것과는 다르다. 모든 어린이는 위대한 시인이 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시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시어로 표현할 감정을 다른 대체 욕구로 채워 넣기 때문이다. 특히 공교육은 시어들을 말살시키고 버리도록 강요한다. 시험 준비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정을 잘 고르는 시험기계가 되어간다. 뇌는 점점 굳어지고 시어가 차지할 여백이 없다. 중고등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 시어가 차지했던 자리에 명예욕, 소유욕, 출세욕, 성취욕 등등 세속적인 욕구들이 똬리를 튼다. 이 똬리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정의 물줄기를 틀어막는다. 감정 경화현상에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가 되어 버린다. 실제 영화 제목이기도 한 '죽은 시인의 사회'는 틀에 박혀 규율이 압도하는 학교 생활을 하는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는 교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늘날 학교는 영감이 풍부한 아이들을 학교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규율과 질서에 효율적으로 복종시키는 방식을 가르치면서 죽은 시인을 대량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장자크 루소(1712-1794)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한다. 루소는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을 잣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원하는 삶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진다고 주장한다. 성취, 명예, 도덕 등은 사회의 요구에 맞추어 나의 욕구를 길들이는 도구들이다. 이것들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듯 보이지만, 우리들의 삶을 억누르고 옥죄는 욕망 덩어리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 불평등도 이 과정에서 생긴다. 루소에게 자연은 타락한 문명 이전의 선한 인간의 본성을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에 감정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시어가 풍부한 그런 상태이다. 사람다운 삶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루소의 외침은 오늘날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 시인을 가리키는 말은 '크란티 다르시(Kranti Darshi)'인데 이 말의 의미는 '혁명의 눈을 가진 자'라고 한다. '혁명'이란 수식어에 눈이 번쩍 뜨인다. 여기에서 혁명은 감성 혁명 내지는 영성 혁명이다. '나의 눈'을 내려놓고 자신을 열 때 자연과 우주가 보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백성호 2015, 233). 가끔 시인처럼 살고 싶지만 나의 눈높이가 너무 높을 때가 있다. 자연과 우주와 눈을 마주 보고 소통할 때 시적 감정이 나올 것이다.


동장군(冬將軍)을 이겨낸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는 이른 봄, 시인의 눈에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나무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고 한다. 새순을 틔우는 나무가 해산의 진통을 겪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나무를 안아준다. 시인의 눈에 나무의 모습만 들어오겠는가. 다른 사람의 희로애락은 얼마나 눈에 잘 들어오겠는가. 시인의 눈은 남다른 점이 있다. 사물과 감정을 관통하는 특별한 눈을 가졌다. 곽재구 시인은 <나무>에서 "... 인간이 아닌 나무가/인간인 내게/시를 읽어주고 싶을 때/나무는 고요히 춤을 춘다...//"라고 의인화시킨다. 시인의 눈에는 춤을 추는 나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나 부처도 뛰어난 시인이다. 그들은 영감이 풍부한 시어로 설교와 설법을 했다. 그 시가 인간 영성의 공이치기를 건들게 되면 불가지의 감화가 되고 은총으로 작용한다. 시인마다 그 눈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다르다. 다산 정약용은 시는 모름지기 백성의 아픔과 함께 하고 현실의 비참을 직시했다. 그래서 그의 눈은 민초들의 삶을 응시했고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읊은 시가 많다. 다산의 시관(詩觀)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박성호 2015, 276-277 재인용)라는 것이다.


폴란드의 대표적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타데우시 루제비치(1921-2014)도 "불행을 느끼기 전까지는 시는 당신 안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다산의 시관과 흡사하다. 루제비치 역시 2차 세계대전 때 점령군에 독일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면서 민족의 불행과 시대의 아픔을 겪은 세대이다. 그는 <시인이란 누구인가>에서 "(...) 시인이란 떠나가는 사람이고/ 결코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다//"이라고 썼다. 필자는 이 구절을 두 가지의 나만의 관점에서 해석해본다. 첫째는 시인도 유한한 사람이라 한번 태어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가 시어로 노래한 시는 그와 함께 영원히 남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록 유한한 시인이 노래한 시는 그의 소멸과는 무관하게 영원불멸하다는 것이다. 육체는 소멸되어도 영혼은 영속되지 않겠는가. 


현대인들은 쫓기듯이 산다. 스트레스라고 부르는 압박이 끊이지 않는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는 압박뿐 아니라 외부 세계에서 주어지는 압박도 있다. 그 압박을 피해 '멍 때리기(hitting Mung)'를 한다. 이 신조어는 유행이 되고 해외 뉴스가 될 정도이다. 멍 때리기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일종의 도피 행동이다. 나무와 하늘을 계속 바라보는 '숲멍', 모닥불을 쳐다보는 '불멍', 흐르는 물을 쳐다보는 '물멍' 등,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 채 시간을 보낸다. 우리 사회는 멍 때리기를 금기시하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멍 때리기는 치열한 경쟁사회가 빚어낸 치유 행위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멍 때리기를 자주 해야 한다. 사실 멍 때리기는 지극 인간적이다. 메마른 감정을 적셔주는 오아시스다. 멍 때리기는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현대식 버전이다.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이성과 합리라는 잣대를 내려놓고 본래 인간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을 위한 실천행위다. 그래서 제안한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풍부한 시어를 갖추고 태어난 시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가끔은 시인처럼 살면 좋겠다. 우선 시어가 풍부한 감정의 흐름을 막지 않고 볼 일이다.


곽재구. 시집 <와온 바다>(나무).

다치바나 다카시. (2002).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이정환 옮김. 청어람미디어.

딜런, 밥. <Blowin' In The Wind>.

박형수. (2021). <중앙일보>. <외신이 본 韓 멍 때리기 슬픈 이유…"코로나·집값 폭등에">. 11월 28일.

백성호. (2015).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판미동.

이태호. (2020). <중앙일보>. <멍하니 있으면 아이디어가 불쑥? 멍 때리기의 역설>. 2월 4일.

작가의 이전글 자서전의 품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