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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Feb 04. 2022

미처 몰랐습니다.

⑦ 국제주의자의 본보기, 의사 노먼 베쑨(1890-1939)

중국인들에게 근대 중국 역사에서 칭송받을 네 명의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두 명은 중국인이고 두 명은 외국인이라고 한다. 두 명의 중국인은 모택동과 주은래이고, 두 명의 외국인은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와 노먼 베쑨(Dr. Norman Bethune)이다. 에드가 스노우는 미국 출신의 저널리스트로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을 출판하여 모택동을 서방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여기에서 다루게 될 노먼 베쑨은 캐나다 출신의 의사로 스페인과 중국에서 인술을 실천에 옮긴 대의(大醫)이다.  


의사 베쑨은 '국경없는의사회(Doctors without Borders)'의 종조(宗祖)라고 말하고 싶다. '국경없는의사회'는 "고난에 처하거나, 자연재해, 인재 혹은 무력 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인종, 종교, 혹은 정치적 신념에 관계 없이 돕는다"라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베쑨이야말로 이 원칙을 현장에서 실천에 옮긴 의사였다. 또한 의사 베쑨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서 추구하는 인도주의적 원칙을 지킨 큰 의사였다고 생각한다. ICRC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 내란 등의 국제적 혹은 비국제적 무력 분쟁에서 전상자, 포로, 실향민, 민간인 등의 희생자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인도주의 단체이다.


오늘날 인류와 의학계는 베쑨이 남긴 의학적 혁신과 공로에 빚을 지고 있다. 베쑨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흉부외과 개업의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36세되던 1926년 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베쑨의 전체 생애를 크게 구분하면, 그가 결핵에 걸려 투병 중일 때와 결핵에서 회복한 이후로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결핵에 걸리게 되면 환자는 침대에 누워 생과 이별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의학적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의사인 베쑨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간의 역사는 우연적 요소가 쌓여 필연의 역사를 쓰게 한다. 그는 결핵요양소로 유명한 뉴욕주 틔루도 요양소(Trudeau Sanatorium)에서 요양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의사 존 알렉산더(John Alexander)가 쓴 <폐결핵 수술(The Surgery of Pulmonary Tuberculosis)>이라는 책을 읽고 눈이 번쩍 띄었다. 알렉산더 박사는 결핵 퇴치를 위한 혁신적 방법으로 인공 기흉술(artificial pneumothorax)을 제안하였다. 인공 기흉술이란 흉강에 바늘로 공기를 주입시켜 전염된 폐를 필요한 만큼 허탈(虛脫)시켜 전염된 폐가 휴면상태에 들어가 더이상의 악화를 막는 새로운 수술법이었다. 베쑨은 혁신적이지만 아직 임상시험으로는 검증되지 않은 결핵 퇴치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하였다.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았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기침이 사그라들고 가래가 사라졌다. 인공 기흉을 시작한 지 두 달 후에 퇴원하게 되었다(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1993).


베쑨은 결핵과의 싸움에서 살아난 후에 “죽음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만이 느끼는 삶의 진실은 그냥 살다가 죽어간 많은 사람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김응수 2013 재인용).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의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건강을 되찾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베쑨과 같은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베쑨의 말은 한 번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 그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느꼈던 삶의 진실은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른 삶으로 안내하는 삶의 철학과 원칙이 되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하게 된 것과, 개업의로서 경험했던 의료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은 늑골 박리기, 베쑨 기흉기, 기계팔, 베쑨 늑골 절단기 등 무려 12가지의 외과의사용 의료기기 개발과 치료방식의 개선으로 이어져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의사로서 그의 시야는 개인과 집단을 너머 국제 사회로 넓혀졌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의료지원단을 이끌면서 이동식 혈액은행을 설립하고 부상자들의 수혈을 가능하게 하여 전시의료분야의 큰 획을 그었다. 의료기기와 치료방식의 혁신에 머물지 않고 의료현실의 제도적인 개혁에도 기여했다. 빈민아동을 위한 몬트리올 아동미술학교를 설립하고 자신의 집을 학교로 사용했으며, 오늘날 캐나다 의료시스템은 베쑨의 설계를 토대로 했다.


노먼 베쑨은 중국인에게 어떤 사람이었기에 중국 근대역사에서 가장 칭송받는 위인들 중 한 명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본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는데, 중국은 항일전쟁에서 발생한 부상자 치료를 위해 서방에 의료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캐나다와 미국 공산당은 베쑨을 중국에 파견하기로 했다. (베쑨은 1935년 캐나다 공산당에 가입했다.) 이때 베쑨은 1938년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는 중국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였고, 중국의 모택동은 베쑨을 팔로군의 의료 책임자 및 진찰기(晉察冀 당시의 산서성, 차하얼성, 하북성 지역) 통일전선정부의 의료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베쑨은 전쟁터의 열악한 환경에서 중국 인민들의 치료를 위해 헌신했다. 베쑨은 위급한 환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헌혈한 피를 수혈하는 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초인적인 의료활동을 했는데, 베쑨의 이러한 사심 없는 행동에 감명 받은 중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전시 헌혈대를 조직하여 수많은 부상자를 살려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베쑨은 최전선에서 기동 의무대를 조직하여 의료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20여 곳에 유격전에 필요한 기지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체계를 혁신하였다. 베쑨의 이러한 헌신적인 의료 활동에 감명받은 중국인들은 베쑨의 이름을 백구은(白求恩)이라고 불렀다. 영어의 White Seek Grace를 중국식 한자어로 풀어쓴 이름이다. 굳이 풀이하자면 ‘은혜를 베풀어 사람을 구하는 백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모택동은 편지에서 베쑨에게 봉급으로 매달 100달러(당시 팔로군 최고사령관의 한달 봉급이 5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했을 때 베쑨은 극구 사양하며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저한테는 현재 돈이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음식, 의복 등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 만약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라면, 그 돈을 가지고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 담배기금 같은 것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1993, 274 재인용). 결국 베쑨에게 지급된 100달러는 환자를 위한 특별기금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모택동의 제의를 거절한 베쑨의 답장 편지를 보면 의사로서 베쑨이 지향하는 철학이 배어있다. 베쑨은 자신의 이익이나 안락함이 아니라 오로지 부상자와 환자의 치료 그의 모든 관심이 쏠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베쑨은 동료 의료진에게 "의사들이여, 부상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대들이 먼저 그들을 찾아 가시오"라고 요구했다(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1993, 300). 이 슬로건은 게릴라 의료봉사의 공식 슬로건이 되었는데, 베쑨은 전시의 의료활동은 평시와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치료 대상인 부상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의사로서 베쑨이 얼마나 선구적인 철학을 지녔으며 순수한 국제주의자였는가는 아래의 연설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인용문은 1938년 베쑨이 의료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그가 직접 계획, 설계하여 진찰기 지구와 팔로군 최초의 시범병원 준공식에서 행한 축하 연설문이다.  


“(...)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하는, 3만 리나 떨어져 있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나 같은 사람이 여러분을 도우러 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과 우리는 모두 국제주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민족, 피부색, 언어, 국경,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파시스트들을 무찔러야 합니다. (...) 의사, 간호사, 요양사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환자들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그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모든 환자를 형제와 아버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환자를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환자를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의무대에서 일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 팔로군에 있을 자격도 없습니다.”(중국 베쑨 정신연구회 2017, 179-180).


위 연설문은 환자는 의사존재 이유이고 의사는 오로지 환자를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의사 베쑨의 철칙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의료는 사람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언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베쑨 곧잘 인용하는 속담이 있다. '의사란 사자의 심장과 숙녀의 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은 곧 의사란 대담무쌍하고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부드럽고 친절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는 의미이다(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1993, 292). 중국인들이 사자의 심장과 숙녀의 손을 가진 의사 베쑨을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칭송하는 인민의 영웅으로 선정하는 이유이다.


중국인들에게 베쑨의 존재가 얼마다 큰 자리를 차지하는가는 다음의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전력면에서 우세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던 중 중국군의 어떤 장교가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돌격! 부상자들을 위해 백구은이 왔다. 돌격! 우리의 뒤에는 백구은이 있다."(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1993, 341-342). 백구은, 즉 의사 베쑨이라는 존재는 전쟁터의 중국인들에게는 천군만마에 다름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전력면에서 일본군에 열세를 면치 못했지만 , 싸우다 부상을 당하면 백구은이 고쳐준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었다.1939년 베쑨은 수술 중 손가락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지신의 생명보다 오로지 환자의 치료를 우선했던 베쑨다운 죽음이었다.국제주의자 의사 노먼 베쑨이 실천에 옮긴 생명 중심의 의료 활동은 인류애가 무엇이고, 인술(仁術)을 펼치는 대의(大醫)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모택동이 닥터 노먼 베쑨의 서거 후에 남긴 추모글로 그를 다시 기린다. "일반 민중들에 대한 닥터 베쑨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교훈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 자체가 그의 인격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그의 무사(無私) 정신을 다투어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그러한 무사 정신의 소유자라면, 누구나 모두 민중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던지는 중요한 인간, 완전한 인간, 덕 있는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테드 알렌, 시드니 고든 1993, 414 재인용).


강대호. (2020). <오피니언 뉴스>. <[강대호의 책이야기] 몸의 질병은 물론 사회의 질병과도 싸운 의사 '노먼 베쑨'>. 2년 8일.

김응수. (2013). <의사신문>. <여러 수술기구를 만든 창의적인 의사-노먼 베순>. 5월 6일.

박영진. (2015). <조선일보>. <[세상을 바꾼 리더]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등 전장 누비며 수많은 생명 구하다>. 8월 20일.

알렌, 테드 . 고든, 시드니. (1993). <닥터 노먼 베쑨>. 천희상 옮김. 실천문학사.

중국 베쑨 정신연구회. (2017). 노<먼 베쑨>. 허유영 옮김. 그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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