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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26. 2022

미처 몰랐습니다

⑥ 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1864-1943)

위대한 인물의 궤적을 좇아가다 보면 크게 세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세 가지란 '그는 누구와 인연을 맺었는가?' '그는 어떻게 노력했는가?' 그리고 '그의 신념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 미국 흑인 역사에서 학자, 연구자, 교육자, 박애주의자로서 귀감이 되는 인물이 있다.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박사이다. 필자는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서술은 물론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조지가 백인이었다면 훨씬 다양하고 다각도에서 역사의 평가가 뒤따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어떤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는가? 조지는 이 지면에 모두 기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들로부터 의미 있는 영향을 받았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생애를 관통할 정도의 커다란 영향을 준 세 사람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조지가 태어난 때는 미국에서 남북전쟁(1861-1865)이 한창이던 때였다. 링컨 대통령(임기 1861-1863)은 1863년 1월 1일을 시작으로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하였지만, 흑인들의 신분은 이전과 달라진게 별반 없었다. 여전히 흑인들은 물건처럼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820년에서 1860년까지 미국 내 노예 매매는 연평균 약 7,500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노예무역 중심도시의 거리에는 노예 전시실, 상품 진열창, 그리고 노예시장에서는 200명 정도의 노예를 경매할 수 있는 노예 창고 등이 산재해 있었다(콸스 2002, 68-70 재인용). 미국에서는 1808년 아프리카에서 노예 수입을 불법으로 규정하였지만, 특히 노예경제에 의존했던 남부에서는 거의 유명무실했다. 남부에서는 면화, 사탕수수, 커피, 담배 등 열대에 적합한 작물을 재배하게 되면서 더 많은 노예들을 필요로 하였고, 이러한 남부의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는 북부와 갈등을 빚게 되고 결국 남북전쟁이란 내전으로까지 치닫고 되었다.


1840년대 미국은 노예 수입을 금지시켰지만, 미국 국토는 흑인 자유주와 소유주로 나눠져 노예의 신분을 놓고 갈등이 고조되었다. 남부주와 북부주가 노예제도에 대한 첨예한 갈등과 대립은 남북전쟁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았다. 연방정부의 노예 수입 금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노예 인신매매단이 공공연하게 활개를 치면서 자유주에 살고 있는 흑인들을 강제 납치하여 소유주로 파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영화 <노예 12년>은 흑인 자유주인 뉴욕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목수일을 하면서 평온한 가정을 꾸려나가던 솔로몬 노섭을 강제 납치하여 남부의 흑인 소유주에 팔아 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는 노섭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한 실화로서 주인공이 지옥같은 노예 생활에 벗어나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조지 워싱턴 카버 역시 미주리주 다이아몬드에서 흑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노예 매매단에게 납치되었다. 조지는 백인 주인의 노력으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그를 낳아준 엄마는 어디론가 팔려갔고 평생 상봉하지 못했다. 조지의 주인인 백인 모제스 카버(Moses Carver)는 독일계 미국 이민자로 조지의 부모 메리(Mary)와 자일즈(Giles)를 윌리엄 맥기니스(William P. McGinnis)로부터 700달러에 샀다. 카버에게는 10명의 누이와 1명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제스 카버 내외는 필요에 따라 노예를 샀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한다. 이 내외는 조지와 형 제임스의 양부모가 되어 그들을 친 자식처럼 키우고 공부도 시켰다. 조지에게 자기 성을 따 조지 카버로 불렀다. 모제스 카버 내외는 조지를 물건이 아닌 인간으로 양육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첫 번째 사람이었고, 조지의 부모나 같았다.


조지 워싱턴 카바는 혹독한 환경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치 않았고 드디어 캔자스주 하이랜드의 하이랜드 대학(Highland College)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부푼 꿈을 안고 하일랜드 대학에 도착한 조지에게 대학당국은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하였다. 대학 학장은 조지에게 '네가 입학서류에 흑인이라는 말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합격시켰다"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은 교육기관에서 철저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벽에 좌절한 조지는 현실과 타협하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하는 주변의 뜻있는 사람들의 격려와 지원으로 다시 대학에 도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의 지향점을 바꾸게 해준 인연이 이어진다.


조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두 번째 사람은 아이오와주 인디애놀라 소재 심슨 대학(Simpson College)의 미술전공 에타 버드(Etta Budd) 교수였다. 이때 조지의 나이는 30세였다. 버드 교수는 조지의 그림에 대한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다. 조지는 심슨 대학의 학창 시절을 이렇게 떠올렸다. "내가 인간이 무엇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안 것은 고등학교에서였으며, 나도 진정 하나의 인간이라고 믿게 된 것은 심슨 대학에서였다."(엘리엇 2004, 73). 당시 미국 사회에서 흑인은 소나 돼지만도 못하게 취급받았고, 조지는 대학에서 비로소 인간다운 대우를 받았다는 점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할 것이다. 버드 교수는 조지를 화가 지망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의 식물에 관한 지식과 재능을 키울 수 있도록 안내했다. (심슨대학은 조지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으며, 과학자로서 조지 워싱턴 카버를 기리는 과학 센터를 설립했다.) 버드 교수는 아이오와주립대 농과대학 원예학 교수로 있던 부친에게 조지를 소개했다. 오늘날에도 아이오와주립대 농과대학은 세계적인 명문이지만, 당시에도 전통적인 농법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농법을 연구하여 미국 농업이 혁신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조지는 아이오와주립대의 최초의 흑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첫번째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인간적인 인연은 조지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양육되고 공부하는 시기였다면, 세 번째 인연은 조지가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고 연구하여 이룬 모든 것들을 쏟아붓을 수 있게 한 인물이다. 바로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과의 인연이다. 워싱턴은 당시 미국에서 흑인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인물로 백인의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하는 방법은 교육밖에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워싱턴은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흑인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우선적인 방안으로 흑인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워싱턴은 흑인의 경제적 독립을 돕기 위해 앨라배마에 터스키기 대학(Tuskegee Institute)을 설립하였다. 워싱턴의 뜻에 동참하여 록펠러와 카네기 등 개인 자선가의 후원도 잇따랐다. 워싱턴의 이러한 현실 타협적인 노선에 급진적인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톰 아저씨의 생각(Uncle Tomism)', 즉 '백인의 얼굴을 한 흑인'이라고 비난했다(이주영 2005). 부커 워싱턴은 자신이 설립한 대학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직업교육을 했다. 청년들에게는 농부가 되는 법, 목수, 대장장이, 배관공, 페인트공 등의 직업을 가르쳤고, 젊은 여성들에게는 요리, 바느질, 간호 등을 가르쳤다(콸스 2002, 168-174). 워싱턴은 농업교육의 적임자로 조지 워싱턴 카버를 초빙하였다. 조지는 워싱턴 학장의 기대, 아니 미국 흑인들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터스키기대학에서 그의 모든 지적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조지 워싱턴 카버의 가운데 이름 '워싱턴'은 부커 T. 워싱턴에서 따왔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극복하면서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조지는 어려운 시절에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산파 마리아 와킨스(Mariah Watkins)의 말을 잊지 않았다. "조지, 세상으로 나가거라.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동족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우리 동족들은 너무도 배움에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You must learn all you can, then go back out into the world and give your learning back to the people.)"(엘리엇 2004, 75). 조지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흑인 차별에도 오로지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특별히 숲 속에서 자연의 생태계 원리를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현장에 적용하는 데 노력했다. 조지에게 거대한 자연은 그의 창의성과 상상력의 원천이었으며, 그는 강의실과 실험실에 살다시피 하면서 수많은 연구성과를 만들어내 미국인의 농법을 개선하여 소득을 증대시키고 식생활 개선과 건강증진에 기여했다. 예를 들어 미국 남부에는 목화를 많이 심는데 같은 땅에 목화를 계속 심게 되면 토양이 척박하게 되어 수확량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윤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윤작은 한해는 목화를 심고 다음 해에는 고구나 또는 땅콩을 심는 것이었다.


조지는 모든 식물은 땅에서 질소 영양분을 많이 흡수하는데, 특히 목화는 가장 많은 질소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 반면에 콩 종류는 질소를 땅에서 흡수하기보다 공중에서 흡수하여 오히려 땅에 공급하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조지는 목화밭 경작으로 척박해진 남부의 토양에 콩, 고구마 등의 대체 작물을 심게 하여 땅의 기운을 되살렸다. 남부에서의 대체작물 재배는 그들의 소득증대는 물론 식생활 개선과 건강증진에도 크게 기여하면서 남부에 농업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땅콩을 이용하여 105가지의 땅콩 요리법을 개발하였고, 접착제, 잉크, 연고, 인조 대리석 등 수백 가지의 유용한 상품을 만들어냈다. 그를 '땅콩박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또 조지는 그림, 요리, 세탁, 연설, 식물학, 수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1941년 타임지는 조지 워싱턴 카버를 '흑인 레오나르도(Black Leonard)'라고 불렀다.


조지 워싱턴 카버의 위대한 점은 자신의 지식과 연구 성과를 민중과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처음에는 수레를 이용하여 이동학교를 만들어 무지한 남부의 농민들을 상대로 효과적인 농법을 소개하고 계몽시켰다. 농민들이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기 때문에 조지는 실습장에서 직접 생산한 무, 호박, 고구마 등을 보여주면서 그 원리를 설명했다. 수레를 이용한 이동학교는 차츰 발전하여 남부의 각처에 자동차식 이동학교로 변모하였다. 그는 산파 마리아 와킨스의 '동족들과 배움을 나눠라'는 당부를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조지 워싱턴 카버는 어떤 신념의 소유자였던가?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런 일화가 있다. 플로리다주의 어떤 부유한 땅콩 재배자가 100달러짜리 수표 한 장과 아주 심한 병에 걸린 땅콩 한 봉지를 보내며, 만약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알려준다면 매월 100달러를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조지는 그 땅콩 병의 원인은 석회질 결핍이라고 지적하고 수표도 함께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의 땅콩을 키우시는 데 아무 보답도 청구하시지 않는데, 제가 그 병의 원인을 발견했다 해서 어찌 보수를 받겠습니까?"(엘리엇 2004, 156 재인용). 그는 터스키기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봉급 인상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그의 월급은 처음 부임할 때 받았던 125달러였다. 조지가 학교의 봉급 인상을 거절하면서 늘 하는 말이 있다. "벌써 온 지구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무슨 돈이 그렇게 필요하겠습니까?" 한 번은 에디슨 연구소에서 연봉 10만 불을 제안하면서 초빙 의사를 알려왔지만, 조지는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대신 그는 어떻게 하면 가난한 농부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남부의 경제적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저술들을 남겼다. 무려 44권이다.


조지 워싱턴 카바는 부커 T. 워싱턴 박사가 묻혀 있는 무덤 옆에 묻혔다. 조지는 자신의 가운데 이름을 워싱턴 박사에서 따올 정도로 그를 존경하였으니 카바와 워싱턴은 이승에 못다 나눈 우정을 마음껏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새겨있다. "그는 그의 명성에다 재물을 더할 수 있었으나 아무것도 취하지 않고 오직 세상 사람을 위하여 봉사함으로써 행복한 생을 누리며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엘리엇 2004, 208 재인용). 서두에 이 위대한 인물에 대한 서술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피력했다. 사실 조지만큼 다재다능한 인물도 드물다.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대학 발전기금을 모으기 위해 순회 공연을 할 정도였으며, 그의 그림은 내놓자마자 팔릴 만큼 그 수요자가 많았다. 또 인도를 방문하여 마하트마 간디를 만나 개발도상국의 영양 문제를 논의한 국제적인 인사이기도 했다(노시창 2019). 그만큼 조지 워싱턴 카바 박사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릴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연구 성과물을 남과 공유했고 그들의 공로로 돌렸다. 겸손과 헌신과 사랑의 아이콘이다. 그의 박애주의자적 헌신과 실험 정신은 후세에 본보기가 되고도 남는다.


노시창. (2019). <VOA>. <[인물 아메리카] 농업경제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 3월 8일.

엘리엇, 로렌스. (2004 ). <땅콩박사>. 곽안전 옮김. 대학기독교서회.

이주영. (2005). <미국사>. 대한교과서.

최윤필. (2017). <[기억할 오늘] 조지 워싱턴 카버>. 1월 5일.

콸스, 벤자민. (2002). <미국 흑인사>. 조성훈, 이미숙 옮김. 백산서당.

쿠크, 알리스테어. (1997). <도큐멘터리 미국사>. 윤종혁 옮김. 한마음사.

한지숙. (2017). <엠코인스토리>. <[역사속 엔지니어] 조지 워싱턴 카버, 신분의 한계를 넘어 기적을 일군 땅콩박사>. 8월 9일.

영화 <노예 12년>(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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