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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17. 2022

2인자의 조건

③ 조선의 탁월한 경세가, 태종대의 명재상 하륜

하륜(河崙 1348-1416)의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이고 호는 호정(浩亭)이다. 하륜의 자(字) '대림'은 '크게 다스린다'이며, '중림'에서 중(仲)은 '으뜸에 버금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륜은 여말선초의 관료로서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등과 함께 이색(李穡) 문하에서 공부했다. 하륜은 조선 태종대에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냈지만 한 번도 신하로서 분수에 넘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능력을 갖추고도 군주에게 순종할 줄 아는 하륜이야말로 태종이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신하였다(조민기 2016, 126-127). 하륜이야말로 우리나라 역대 왕조에서 2인자로서 필요충분조건을 넉넉히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하륜이 중앙 무대에 데뷔하게 된 것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하륜이 고려 공민왕대 과거시험을 볼 때 스승이자 감독관이었던 이인복은 하륜의 인물됨이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으려 했지만 미혼인 딸이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동생(이인미)에게 사위로 삼게 했다. 이인복은 아래로 다섯 명의 남동생들이 있었는데 바로 아래 동생 이인임은 공민왕 사후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하기 바로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렸다. 하륜은 이인임의 조카 사위가 되어 중앙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이인임이 권력에서 멀어지면서 국정 농단의 연대 책임을 져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하륜은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건국했을 때 출사 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개국 초 인재난에 시달렸다. 고려에서 일했던 능력 있는 인물들은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명분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산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조선 왕조는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기 위해 과거시험도 시행해보았지만 고려의 대부분 선비들은 이성계의 역성혁명 왕조에 참여를 거부했다. 일부 사람들만이 마음을 바꿔 조선에 출사 했는데 이중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하륜, 권근 등이었다. 그들은 혁명 왕조에 참여를 거부한 고려 유생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새로운 왕조에서 자신들의 뜻을 펼쳐보자는 의지가 강했다. 이성계는 하륜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여 고려 출신 인재들을 중용한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하륜이 조선 왕조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한양 천도(遷都)와 관련해서였다. 풍수에서 발군의 실력을 지닌 하륜은 개경에서 공주의 계룡산 부근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이성계의 계획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그 대안으로 오늘날 신촌과 연희동 일대 '무악'을 추천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중략)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 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 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태조실록> 1393년(태조 2년) 12월 11일). 이 상소문으로 이성계는 계룡산 부근으로의 천도를 중지하고 오늘날 북악산을 주산으로 도읍지를 정하게 되었다. 하륜이 천도 문제로 이성계로부터 신임을 얻게 되면서 정도전이 하륜을 경계하는 마음이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은 혁명에 반대했다 마음을 바꿔 조선에 출사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중앙에서 중용하는 것보다는 지방이나 외직으로 보냈다.


한편 1396년(태조 5년)에 표전문(表箋文) 사건이 발생한다. 표전문이란 사대 외교문서인데, 당시 명나라 황제 주원장(1328-1398)이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의 글귀를 트집 잡았다. 주원장은 문서에 “경박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있다”며 책임자인 정도전(鄭道傳)을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자칫 신생 조선과 명국 간의 외교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그렇다고 태조는 자신의 최측근 정도전을 명국에 보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여기서 잠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왜 문구에 민감한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원장은 중국 역대 왕조의 창업자 중 가장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던 인물이다. 그는 거지와 도둑질은 물론 중노릇까지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였다. 황제가 된 주원장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연상시키는 글자를 못쓰게 했다. 도적의 도(盜) 자는 물론 길 도(道) 자도 못쓰게 했다. 승(僧) 자를 못쓰게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심지어 머리 깎은 중을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빛 광(光) 자도 금지시켰다. 명나라 초기에는 많은 문신들이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문자옥(文字獄)을 당했다(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2019, 69-72).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 사건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발생했다고 본다.   


조선 태조 이성계에게 골칫거리였던 표전문 사건을 해결한 것은 하륜이었다. 하륜은 명 황제가 지목한 정도전이 직접 명국에 가 해명하라고 주장했지만, 이성계는 하륜과 권근을 명나라에 보냈다. 하륜은 표전문 사건을 무난하게 해결하는 공을 세우고 돌아왔지만, 중앙정치에서는 정도전의 견제에 막혀 지방관을 전전했다. 표전문 사건은 하륜이 최고 실권자인 정도전과는 한 배를 타고 일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과 하륜의 정치적 이상은 너무 달랐다. 정도전은 재상을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를 주장한 반면, 하륜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인재들을 두루 발굴하여 활용한 것보다는 자신의 노선과 이상에 맞는 인물을 썼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정도전은 자신의 정치철학에 맞지 않은 신진세력들을 견제하고 그들을 지방이나 외직으로 보내 중앙으로의 진출을 차단했다. 정도전의 열망은 순수했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 반대파를 집요하게 숙청했다. 


하륜은 정도전의 견제를 받는 가운데 자신이 충성을 받칠 군주로 이방원(태종)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후 1, 2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우면서 태종의 책사로 뿐 아니라 중앙정치의 거물로 성장하게 된다. 하륜이란 물고기가 태종이란 물을 만나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할 정치적 배경을 마련했다. 또 하륜과 태종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번의 사건이 있다. 태종의 목숨을 두번이나 구했다. 첫째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머물던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태종이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이성계를 맞이할 때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천막의 중간 기둥을 굵은 나무로 만들라'라고 건의하였다. 이성계는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태종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천막의 대들보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였고 날아온 화살은 천막 기둥에 꽂혔다. '살꽂이'라는 이름과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둘째는 태종이 아버지 태조의 환영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하륜은 내관에게 대신 곤룡포를 입혀 보내라고 진언하였다. 곤룡포를 입은 내관이 태조에게 술을 따라 올릴 때 태조는 뒤에 숨겨둔 철퇴를 내리쳤고 내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이후 태조는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태종을 죽일 생각을 단념했다고 한다.


'개혁은 정몽주처럼, 혁명은 정도전처럼, 인생은 하륜처럼'이라는 말이 있다(조민기 2016, 106). 정몽주, 정도전, 하륜 모두 고려말의 대학자 이색 문하에서 공부했다. 동문수학의 선후배 사이다. 그들은 서로 정치적 이상을 달리했는데, 정몽주는 일편단심 고려에 충절을 지켰고, 정도전은 급진적인 개혁으로 새 왕조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하륜은 역성혁명에 반대하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조선에 출사했다. 우리나라 왕조사에서 여말선초에서처럼 걸출한 정치가와 경세가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세 사람이 차지하는 존재감은 크다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스스로 군주를 선택했고 이 선택으로 그들의 삶의 궤도는 달라졌다.


하륜 역시 공인으로서 완벽할 수 없었다. 그도 청탁이나 뇌물 수수 등 권력을 남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하륜은 평소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인사 행정 할 때 이를 이용했다. 하륜은 학문이 해박하고 정사에 재주가 있어 재상으로서의 체모는 있지만 청렴결백하지 못하고 일을 아뢸 때도 여염의 청탁까지 시간을 끌며 두루 말하곤 했다. 내 생각으로는 보전하기 어려울 것인데도 태종께서는 능히 보전하시었다"(<세종실록> 1438년(세종20년) 12월 7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하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면서 웬만한 권력 남용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고 이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 따르면 태종의 하륜에 대한 평가는 대략 이러하다. "정승 하윤(河崙)은 사람됨이 남의 잘하는 것은 되도록 돕고, 남의 잘못하는 것은 되지 아니하도록 말리어, 충직하기가 견줄 사람이 없다."(<세종실록> 1420년(세종 2년) 5월 8일). 하륜은 재상으로서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특히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뿐이 아니다. 하륜은 호패법 시행, 신문고 설치, 관등에 다른 관복 제정, 관원의 정년 퇴직(70세) 등 인사 정책 제정 등 수많은 개혁을 주도하였다. 하륜은 태종대의 2인자로서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면서 태종과의 20년이 넘는 수어지교(水魚之交)의 탄탄한 인연을 바탕으로 조선의 내치와 외치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홍규. (2021). <태종처럼 승부하라>. 푸른역사.

조민기. (2016). <조선의 2인자들>. 책비.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393년(태조 2년) 12월 11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420년(세종 2년) 5월 8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438년(세종20년) 12월 7일.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2019). <역사저널 그날>.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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