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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Jan 11. 2022

2인자의 조건

② 조선의 명재상, 황희(黃喜)

필자는 2인자가 최고 권력자와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최고 권력자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통찰력과 지식을 구비해야 하고, 둘째는 최고 권력자가 설정한 권력 행사의 금도(襟度)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셋째는 최고 권력자와의 인간관계를 초심대로 지켜나가기 위한 확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조선의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야말로 2인자로서의 필요충분조건을 구비했다고 생각한다. 


황희(1362-1452)의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황희의 호(號) 방촌은 황희의 캐릭터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한자 방(厖)은 일반적으로 '방대(厖大)하다'처럼 '크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후덕하다(厚)'와 '섞이어 어지럽다(雜)'라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황희는 그의 호와 같이 후덕하고 넉넉한 성품을 지닌 성인군자의 반열에 들지만, 더 깊이 자세히 살펴보면 세속의 일과 섞여 판단이 어지러운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와 연배와 상관없이 이름을 피하고 호를 즐겨 불렀다고 하는데, 그 호에는 개인의 성품이 고스란히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황희는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하게 자리잡히던 태종대와 세종대 50여 년 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나라 왕조시대를 통틀어 20여 년이나 재상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없을 것이다. 황희는 고려말 관직을 지내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칩거 생활을 했다. 두문동 72현(賢) 중 한 명이었지만 동료들의 등에 떠밀려 마지못해 세상으로 나와 조선의 신하가 되었다. 황희가 두문동에서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동료들에 대한 마음의 빚은 평생 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그 마음의 빚은 황희로 하여금 더욱 분발토록 하는 특별한 동인(動因)이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조선 왕조에 발을 들여놓은 황희를 세자 방석의 스승으로 삼았다. 조선이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열었지만 고려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황희를 왕세자의 스승으로 삼은 것은 새 왕조에 들어온 고려의 지식인을 높이 쓴다는 상징적 효과를 노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성계가 황희를 세자의 스승으로 삼은 것은, 당시 황희에 대한 높은 학문적 평판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이성계의 정치적 효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황희는 태종의 눈에 들었다. 태종은 황희에게 국정 전반에 대해 자문을 들었다. 대표적으로 폐세자 문제를 놓고 태종은 황희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태종은 원래 적장자 양녕(이제)을 왕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1, 2차 형제의 난을 일으킨 주동자로서 그 누구보다 왕세자로서 적장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양녕도 왕세자로서 나무랄 데 없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세자 양녕의 일탈은 태종으로 하여금 왕세자를 교체하게 했다. 왕세자 교체는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사안이다. 태종이 황희에게 폐세자 건에 대해 물었을 때, 황희는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황희는 왕세자는 적장자가 되어야 하며, 부족한 점은 훈육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유교국가에서 적장자를 폐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더욱이 태종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면서 무력으로 왕위를 쟁취한 사람이 아니던가. 


황희는 신상에 닥칠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왕에게 할 말은 하는 신하였다. 이는 황희의 색깔을 뚜렷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태종 자신도 황희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는 일에 반대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정두희 1997, 10). 이 일로 황희는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태종이 경기도 교하(交河)에서 유배 중인 황희를 그의 향리인 남원(南原)으로 유배 조치하면서 내린 명이 실록에 실려있다. "경(卿)은 비록 공신이 아니지마는 나는 공신으로 대우하므로, 하루이틀 동안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불러 보아서 하루라도 나의 좌우에서 떠나 있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지금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양경(兩京: 한성과 개경) 사이에는 거처시킬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경을 경의 향관(鄕貫)인 남원(南原)에 옮겨 두니, 경은 어미와 더불어 편리할대로 함께 가라." (<문종실록>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태종이 황희를 얼마나 아끼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황희는 양녕을 폐세자 하고 충녕(세종대왕의 군호)을 왕세자로 옹립하는 것을 반대하고, 심지어 외숙되는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죄상을 밝히는 데 앞장섰지만, 세종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종의 입장에서는 황희야말로 자신이 세자가 되는 길을 막았고, 든든한 배경이 되어준 외숙들을 처벌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사간원에서도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황희를 불충죄(不忠罪)로 다스려 복직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세종은 "(...) 너희들이 태종의 뜻을 어떻게 짐작할 수가 있겠는가? 이미 서울로 돌아온 이상 이를 번복할 수 없다"라고 답하였다. 국가지도자로서 세종이 넓고 큰 그릇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세종은 인재를 알아보는 남다른 식견 때문이기도 하지만, 황희의 공평무사하고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는 처신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필자는 황희가 노예문제를 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노예에 관해서는 종모종부법(從母從父法)을 따랐다. 어머니 또는 아버지가 천인이면, 즉 부모 중 한쪽이 천인이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무조건 천인이 되었다. 노예를 재산으로 보는 당시로서는 노예제도의 변경만큼은 양반이 양보할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문제였다. 종모종부법은 소수의 양반 사대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법이었다. 개인의 노예가 많을수록 국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태종은 종모종부법을 종부법(從父法)으로 바꿔 양인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양인이 되는 구조로 만들고자 했다. 태종의 노비제도개혁에 황희를 제외한 모든 신하들이 반대를 했다(이정일 2018, 244-252). 황희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보다 노비보다 양민을 늘려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역동성에 기여했다.  


이처럼 황희는 최고 권력자를 도와 국정을 이끌었으며 처신을 올곧게 하면서 공평무사하게 업무를 처리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최고 권력자와의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마무리하여 그의 행적은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세종대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김종서를 시켜 6진을 개척하고 조선의 국경을 두만강으로 확정지었는데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800여 년 만에 우리의 옛땅을 수복한 쾌거였다. 김종서는 바로 황희가 세종에게 추천한 인물이었다. 황희 역시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발굴하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황희만큼 2인자로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인물도 찾기 어렵다. 문종실록의 황희에 대한 졸기(卒記)를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황희는 천성이 너그럽고 부드럽고 신중하며 재상으로서의 식견과 도량을 지니고 있었다. (...) 옥사를 다룰 때도 너그럽게 처리하였다.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경솔하게 남의 죄와 형벌을 정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비록 늙었어도 책을 놓치 않았으며, 항상 한 눈을 감고 생활하면서 시력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비록 잔글씨일지라도 읽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24년간이나 재상을 지내어 그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정두희 1997, 18 재인용). 물론 황희가 사적, 공적 영역에서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다. 그와 관련된 부패와 청탁 연루에 따른 허물은 그가 남긴 업적의 큰 그늘에 가려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조선의 양반 계층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황희를 청렴과 청빈의 아이콘으로 황희의 존재를 왜곡, 확대하였다는 지적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결국 황희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고의 조건을 구비한 2인자가 된 것은, 황희가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에 태종과 세종이란 최고 권력자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종화. (1997). <대하역사소설 세종대왕>. 기린원. 

박홍규. (2021). <태종처럼 승부하라>. 푸른 역사.

송은명. (2017). <위대한 2인자들>. 시아. 

이정일. (2018). <조선왕조실록 2>. 다산초당.

정두희. (1997). <조선시대 인물의 재발견>. 일조각.

<문종실록> 권12, 2년 2월 황희의 졸년기사(卒年記事).

<문종실록>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KBS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2019). <역사 저널 그날>. 민음사.

https://ko.wikipedia.org/wiki/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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