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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Feb 12. 2022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세 번의 if

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파격 발탁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이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순신은 국가에 대한 충의는 물론이고 개인의 인격 측면에서도 타의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만고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국가의 대표적인 영웅을 전쟁의 공적으로만 제한한다면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영웅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 전쟁에서 세운 전공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면모에서도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큰 감동과 특별한 울림을 준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에 대한 연구는 실록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장초(壬辰將草)>와 정조의 지시로 1795년 간행된 <이충무공 전서> 등 개인과 국가 차원의 자료를 토대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오히려 국외에서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이순신과 함께 해상에서 싸웠던 명나라 진린(陳璘) 제독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진린 제독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에 대해 상세히 보고해 수군도독 벼슬과 도독인(都督印)을 내려주도록 하는 데 앞장섰다(이민웅 2021, 408). '보천욕일'은 '하늘을 수리하고 해를 목욕시킨다'라는 뜻으로 이순신의 엄청난 공적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이 글은 임진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회고록에서 남긴 이순신에 대한 글이다. 필자는 국내외 수많은 명사들이 이순신 장군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전장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참전했던 중국 장수와 일본 장수의 평가야말로 가장 진정성 있는 평가라고 생각해본다. 그런 이순신 장군과 관련지어 만약 if 상황을 적용하여 역사적 상상력을 키워보는 것도 장군의 공적, 사적 관계를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첫 번째 if는 '만약 이순신이 1591년 2월, 정확히 임진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이다. 이순신은 정읍현감에서 무려 7 품계를 건너뛰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왕조시대에 절대 권력자인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의정 류성룡은 선조에게 이순신을 전라좌수사 추천했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서울의 한 동네에서 형동생하던 사이였다는 점에서 류성룡의 추천이 자칫 연고관계에 따른 실 추천이라는 비판도 받을 수 있지만, 당시 류성룡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비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추천한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도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을 지니고 있어 수군 리더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기술하고 있다(류성룡 2021, 43-45). 류성룡과 이순신의 관계는 나중에 부연할 기회가 있겠지만, 문관 류성룡과 무관 이순신의 인간적인 신뢰 관계 또한 임진란을 극복하는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신뢰가 높았던 것 같다. 선조는 1583년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일으킨 난을 진압할 때 이순신이 세운 전공을 높이 평가하면서 후일 그를 크게 쓰고자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물론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높은 평가는 자신이 신뢰하는 류성룡의 추천 또한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만인지상 국왕인 선조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파격 발탁하고자 할 때 조정에서 반대가 빗발쳤다. 조선 왕조의 특성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언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기능이 작동한 것이다. 특히 사간원의 간관(諫官)은 국왕의 잘못된 정책 및 언행 등에 대해 직간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하지 않던가. 간관은 목숨을 내놓고 국왕의 면전에서 잘못을 꼬집는다. 조선 왕조가 500여 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기구였고, 이 기구가 제대로 작동할 때 왕과 관료들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엄격한 검증 절차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간원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진도)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 정해진 규정을 크게 뛰어넘어 임명)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遞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꿈)시키소서!"라고 간언 했다. 아무리 인재 가뭄이라고 해도 너무 지나친 파격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도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6일)고 말했다. 선조는 이후에도 이순신의 파격 발탁에 대해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위기 상황에서는 규정을 유연하게 적용하여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 선조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높게 보고 나름 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의 강력한 의지를 확인한 비변사에서는 이순신을 남쪽 바다의 네 군데 수영(水營), 즉 경상좌수영, 경상우수영,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전라좌수영을 책임지는 전라좌수사로 배정했다. 전라좌수영(본영은 여수)은 다른 수영들에 비해 그 규모가 절반에 불과했다고 한다(송우혜, 이철원 2017). 또한 7단계의 품계를 한 번에 건너뛰는 것에 대한 비난을 의식하여 먼저 종 5품의 진도군수로 임명했다가 곧바로 종 3품 가리포 첨사로 고쳐 임명했으며, 마지막 순간에 다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는 절차를 밟았다(이민웅 2021, 66).


만약 선조가 류성룡의 추천에 반대하였거나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따라 심(御心)이 흔들려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임진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남서해안 제해권(制海權)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선조대에 수군 폐지론이 대세가 된 적도 있었다. 일본군은 육전보다 해전에 능하기 때문에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의 역량을 증대시키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이철원 2011). 조정에서 수군 폐지의 중론에도 불구하고 류성룡의 이순신 추천과 선조의 임명 강행은 조만간 왜적의 대규모 침략을 당하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신의 한 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은 파격 발탁과 승진으로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여 추천인과 임명권자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정황을 심각하게 판단하고 수군을 전시체제로 탈바꿈시켰다. 폐지 대상까지 되었던 수군을 재정비하고 전선을 건조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확충하였다. 태종대에 일시 등장한 귀선(龜船)을 연구하여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밤을 낮으로 삼아 종횡무진 최강 수군 재건에 전념했다. 이순신 장군은 육지에서보다 바다에서 그의 직감력과 통찰력이 더 빛났다. 그가 23전 23승의 전적을 기록한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의 유비무환의 빈틈없는 자세와 민관군을 하나로 묶는 위기 관리 리더십이 모여 누란(累卵)의 조선을 위기에서 구하였다.


김종대. (2020).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시루.

김훈. (2001). <칼의 노래>. 문학동네.

류성룡. ( 2021). <징비록>. 오세진, 신재훈, 박희정 역해. 홍익출판미디어그룹.

송우혜, 이철원. (2017). <조선일보>.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이순신 전라좌수사 발탁의 진상>. 1월 18일.

이규희. (2019).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임진왜란 이야기>. 토토북.

이민웅. (2021). <이순신 평전>. 책문. 

이순신. (2019).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여해.

이재운. (2015). <소설 징비록>. 책이 있는 마을. 

이철원. (2011). <중앙선데이>. <日 침략의도 간파, 전라좌수사 되자마자 전쟁 준비>. 12월 31일.

정두희. (1997). <조선시대 인물의 재발견>. 일조각.

황현필. (2021). <이순신의 바다: 그 바다는 무엇을 삼켰나>. 역바연.

<문화재청>. <바른 정치 구현을 위한 조선시대의 언론기관, 언론 삼사>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644&bbsId=BBSMSTR_1008&nm=NS_01_10

<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16일.

<위키백과>. <이순신>.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8%9C%EC%8B%A0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

영화 <명량>(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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