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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Feb 13. 2022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세 번의 if

② 선조가 이순신을 사형에 처했다면?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 번째 if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임진란 당시 조선의 붕당(朋黨) 구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붕당은 조선 중기 이후에 나타난 조선의 정치 운영 형태로서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을 말한다. 조선의 붕당은 현대의 정당 제도와 유사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학문적 유대까지 공유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할 것이다. 


조선의 붕당은 언제로 거슬러가는가? 조선 14대 국왕 선조대(재위 1567-1608)인 16세기 후반 이조전랑(吏曹銓郞)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과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하는 신진 사람인 동인이 결집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에 있어 서인(西人)으로 부르고,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었다는 이유로 동인(東人)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조전랑 자리가 어떤 자리이기에 이처럼 붕당을 만들 정도였던가? 이조전랑은 5품(정랑)과 6품(좌랑)의 낮은 자리이지만, 문반 관료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의 노른자 자리라고 할 것이다. 이 자리는 관례적으로 홍문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임명되는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三司)의 공론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할 수 있다. 국가의 주요 보직에 대한 인사 추천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이다 보니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향후 지배적인 권력 집단을 형성하는 데 첨예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연에 따라 결집되었는데, 결국 조정에서 권력을 어떻게 나눠가질 것이냐의 정치 이해관계를 가진 신하들 사이의 합종연횡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동인은 영남의 거유(巨儒)였던 이황과 조식의  문하생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서인은 주로 서울 근방에 생활 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주로 학문적으로 이이와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던 시대에 정치적 특성을 붕당정치로 정리하였다. 필자는 조선의 붕당 정치야말로 조선 중기 이후 정치, 사회는 물론 국제 관계를 규정짓는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짚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 번째 if로서 '그는 어떻게 해군 최고사령관에서 사형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가?'이다. 필자는 선조가 이순신에게 역모죄를 물어 사형까지 시키려고 결심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원균의 교만함과 이순신에 대한 우월감, 둘째는 붕당 정치의 희생, 그리고 셋째는 선조의 병적인 의심과 질투다. 


첫째, 원균의 교만함과 이순신에 대한 우월감에 대해 살펴보자. 원균은 이순신보다 다섯 살이 많고 무과에는 이순신보다 9년 일찍 급제했다. 연배로 보나 가문과 정치적 배경으로 보나 우월감을 가질 만도 하다. 또한 원균은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윤두수(1533-1601)와 혼인 관계를 맺은 고려 개국공신 집안의 자제인 관계로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반면 이순신 가문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 조정에서 그를 지지한 주요 인사는 동인의 류성룡 등 소수에 불과했다. 원균의 교만함과 이순신에 대한 우월의식이 드러난 것은 임진란에서였다. 임진란 당시 경상 우수사 원균은 경상 우수영의 전선을 모두 잃고 3척 만을 거느리고 이순신에게 와서 경상도 해역의 왜군을 치러 가자고 간청했지만 이순신은 부탁을 거절하고 출진을 보류했다. 이때부터 원균은 이순신에 대한 원망이 생기면서 알력과 갈등이 폭발하였다고 한다(류성룡, 2021, 150-151). 그러나 이순신 입장에서는 원균의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도 없었다. 전라좌수영 군사를 관할 지역 밖으로 움직일 수 없으며 이는 국왕의 승인이나 명령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원균과 이순신의 관계가 틀어진 시점을 한산대첩 이후로 잡고 있는 시각이 많지만, 적어도 1차 출전 때부터 악화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민웅 2021, 140-146).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모두 84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원균이란 인물이 이순신의 기록에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원균은 자신보다 상급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지휘권에 발발하거나 자신의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거짓으로 조정에 장계를 보내기도 하였다(정두희 1997). 이순신이 오죽했으면 조정에 장계를 보내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청했겠는가 싶다. 원균은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는 이순신을 비난하면서, 선조에게 "신이라면 한 번에 왜놈들을 바다에 밀어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의 전략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 서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면서 전황을 냉정하게 진단하기는커녕 오히려 헛된 기대감을 가지게 한 원균을 높이 평가하고 이순신의 통제사직을 박탈하고 죄를 씌우게 된다. 


선조에게 큰소리를 쳤던 원균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새로 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큰소리를 쳤지만 출전을 머뭇거리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출전하여 이순신이 재건한 수군을 전멸시키고 만다(류성룡 2021, 152). 칠천량 전투의 패배는 임진란에 조선군이 기록한 최악의 대패였다. 원균의 비틀어진 교만심과 우월감이 생사람을 잡고 조선의 전쟁수행능력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결국 선조는 원균의 거짓 보고와 서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일본의 재침과 함께 전쟁을 장기화시키는 등 국가적 위기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둘째는 이순신이 붕당 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선조대에 본격화된 붕당 정치가 백성과 국가의 미래에 얼마나 치명적인 가는, 임진란 발발 2년 여 전 일본으로 파견된 통신사가 말해준다. 1590년 3월 조선에서는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의를 탐지하도록 했지만, 돌아온 통신사의 보고는 서로 달랐다.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보고한 반면, 동인 김성일은 일본이 침략할 낌새는 전혀 없었으며, 도요토미의 사람됨도 쥐와 같이 생겨서 전혀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보고하였다. 통신사의 보고가 다른 것과는 별개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지만 조선은 한사코 무시하였다. 확증편향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론을 통일하여 전쟁 대비하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인데도 조선의 정치는 붕당의, 붕당에 의한, 붕당을 위한 정쟁을 일삼고 있을 뿐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원균은 서인의 실력자 윤두수와 인척 관계로 서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원균이 이순신에 대한 거짓 보고를 조정에 보냈을 때마다 이순신에 대한 조정과 선조의 불신은 가속되었다. 그리고 명과 일본이 강화협정을 벌이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이순신의 소극적인 전쟁 대응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조정과 선조는 원균의 거짓 보고가 도착했을 때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이순신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극에 달했고 결국 이순신의 삼도통제사직을 파직하고 역모죄로 한양으로 압송한 것이다.


셋째의 원인은 조선 국왕 선조의 의심과 질투다. 선조의 귀는 팔랑귀였나 보다. 팔랑귀는 무엇인가?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으로서 이들은 의심과 질투의 화신으로 자기 줏대가 없어 별거 아닌 것에 쉽게 혹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 국왕을 차지하고 그것도 위기관리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국가 간 전쟁을 지휘하다 보니 옆에는 그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이 들끊게 되는 것은 보나 마다이다. 전쟁 전에는 이순신을 무려 7 품계를 건너뛰게 하고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라좌수사로 발탁, 임명하였던 선조였지만, 전쟁의 와중에는 최고 사령관 이순신을 불신하고 급기야 질투와 의심의 화신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이 역모죄로 사형 집행 전까지 간 것은 전쟁 중 선조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병적인 의심을 품게 되고, 이와 더불어 붕당 정치가 선조의 팔랑귀를 잡았다 놓았다 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전쟁 이후의 국가경영에 필요한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자신의 체면 유지와 권위를 높이는데 더 큰 관심을 두었고, 전란 중에도 붕당 정치를 일삼는 신하들은 이런 선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결국 원균의 이순신에 대한 모함은 선조의 의심과 붕당 정치와 상승 작용을 하면서 무고한 이순신을 제물로 삼은 것이었다. 또한 일본군조차도 선조의 팔랑귀를 이용하여 반간계를 써 이순신을 역모죄로 옭아매고 일시에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선조와 조정이 이순신 장군에게 씌운 죄목은 네 가지이다. (1)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2)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3)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한없이 방자한 죄, (4) 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 (1) (2) (3)은 국내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죄목이라면, (4) 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라는 것은 일본군의 반간계의 기획이었다.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첩자 요시라를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앞바다를 건너올 테니 조선 수군이 체포하라”라고 충동질하고 김응서는 이 내용을 조정에 보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이 내용을 그대로 믿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움직이라고 지시했지만, 이순신은 믿지 못할 내용이라고 판단하고 조정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반간계는 가뜩이나 이순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선조와 조정에게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또 다른 빌미를 제공했다(오귀환 2004). 조선은 일본의 반간계에 제대로 걸려들었고, 일본은 이순신이 없는 바다를 마음껏 유린할 수 있었다. 


국왕으로서 선조는 질투와 의심의 화신으로 무능하고 옹졸하였다. 선조는 밤을 낮으로 삼아 오로지 조선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민관군을 하나로 묶어 혼신을 다하고 있는 야전 사령관을 전후좌후도 따져보지 않은 채 대역죄로 몰아 고문을 가하고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이 의금부에서 풀려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 내 몸을 으깨는 헛것들의 매는 뼈가 깨어지듯이 아프고 깊었다."(김훈 2012, 14 재인용). 


선조는 류성룡, 이원익, 정탁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순신을 죽이지는 않고 권율 장군 휘하로 백의종군하도록 했다. 선조는 오랜 전란으로 지쳐버린 백성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면서 조선의 희망으로 부상한 이순신을 죽였을 때에 돌아올 반대급부를 두려워했던 것일까? 다시 칼의 노래에서는 선조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 "임금은 적이 두려웠고, 그 적과 맞서는 수군통제사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것이 임금의 싸움이었다."(김훈 2012, 75 재인용). 사실 선조가 즉위부터 의심 많고 옹졸한 국왕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 왕조에서 적통이 아닌 방통으로 즉위한 왕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백성을 생각하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선조는 즉위 초부터 좋은 정치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사림(士林)이라 불렀던 신진세력들과 덕망 있는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선조는 방통으로 왕위를 승계했다는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부모가 왕과 왕비가 아닌 서자 출신의 왕이라는 콤플렉스는 곧 선조의 비뚤어진 자존심으로 연결되고 지나친 권위 의식은 주변에 듣기 좋은 말을 간하는 신하들로 채웠다. 만인지상의 국왕이 팔랑귀의 소유자이다보니 내치는 물론 외치에서도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다시 if로 돌아와서 선조가 이순신을 죽였다면 전쟁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순신의 죽음을 가장 반기는 일본군이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투옥되었을 때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을 재침략하고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을 전멸 지경으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만약 이순신이 사형을 당해 이순신이란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계속했다면, 일본군은 남해와 서해에서 조선 수군을 몰아내고 조선 정벌의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 정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나라까지 넘보게 되면서 한반도는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전쟁터가 되었을지 모른다. 또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고 중국으로 침략했던 역사가 4세기 이상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민웅. (2021). <이순신 평전>. 책문.

김시덕. (2015). <조선일보>.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김응서 vs 고니시 유키나가 ①>. 7월 3일.

김훈. (2001). <칼의 노래>. 문학동네.

류성룡. ( 2021). <징비록>. 오세진, 신재훈, 박희정 역해. 홍익출판미디어그룹.

박기종. (2016). <매일경제>. <‘聖君에서 暗君으로’, 선조 리더십의 변명|내 사람을 키우되 그를 대신할 사람을 준비하라>. 12월 1일.

오귀환. (2004). <[이순신1] 이순신, 내부의 적과 싸우다>. 10월 8일.

이순신. (2019). <난중일기>. 노승석 옮김. 여해.

정두희. (1997). <조선시대 인물의 재발견>. 일조각.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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