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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철현 Feb 14. 2022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세 번의 if

③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숨겨놓지 않았다면?

앞에서 기술한 대로 1597년 1월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붕당 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삼도수군통제사직을 박탈당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과 함께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군이 선조의 팔랑귀와 붕당을 이용한 반간계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이순신이 제거된 남쪽 바다에서는 새로 통제사가 된 원균이 남쪽 칠천량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선조는 승전보를 기대했지만, 전황은 원균이 큰소리를 친 것처럼 전개되지 않았고 조선 수군은 대패를 당하고 원균도 죽었다. 조선 수군에게 칠천량 해전은 최악의 참패로 기록되는데 이 패배로 조선 수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이순신이 지난 5년 동안 무패의 강군으로 키워놓은 조선 수군의 자긍심과 그 불패의 신화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원균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개인에 대한 평가는 다각도에서 보다 더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는 주로 <난중일기>나 <징비록> 등 개인의 기록에 의해 기술되고 있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다. 여하튼 이순신 장군에 대해 우월의식이 강했던 원균은 이순신이 파직, 압송, 투옥되고 난 뒤 새로 통제사로 부임하면서 조선 수군의 실정과 일본군의 형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수군의 압도적인 우위에 사기가 많이 꺾였을 것이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력은 134척의 전선, 1만 3,200명의 병력에 불과했다. 국왕에게 '왜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라고 큰소리쳤던 예전의 원균이 아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누구든지 책임져야 할 위치에 앉게 되면 그 책임감과 중압감이 그를 성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원균도 전임 통제사 이순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원균에게 조정에서는 성화를 내며 독촉해왔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원균은 쉽게 출동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급기야 도원수 권율이 원균을 소환해 곤장을 치는 사태까지 생겼다(류성룡 2021, 252-260). 국왕과 조정이 야전 사령관의 판단을 존중하기는커녕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등 떠밀듯이 전투에 임하는 장수가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칠천량 대패 이전만 해도 원균은 나름 군공을 세운 맹장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전황은 그의 호언장담과 기고만장을 뒷받침할 수 없었다. 심한 풍랑으로 하늘조차 원균을 돕지 않았다. 


다시 if로 돌아가자. 이순신 장군의 세 번째 if는 경상 우수사 배설(1551-1599)에서 비롯된다. 지휘관으로서 배설은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지휘하는 칠천량 전투에 참전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도망쳤다. 배설의 경우 상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전쟁터를 무단으로 이탈하였다는 점에서 탈영에 해당했다. 칠천량 해전에서는 전투 중에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선을 끌고 도주하였지만, 명량해전을 앞두고서는 개전도 하기 전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탈영했다. 당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의 전력을 놓고 볼 때 어디 배설만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겠는가 싶다. 십중팔구의 조선 수군은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군 전선과 맞서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배설은 임진란에서 가장 부끄러운 지휘관으로 인식되어 영화나 소설 등에서 그를 비겁한 군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배설에 대한 평가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배설 장군의 후손들과 경주 배 씨 문중에서는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死者)의 명예훼손 혐의'로 영화 <명량>의 감독과 작가 등을 고소하기도 했다. 백번 이해가 된다. 후손들의 입장에서 선조에 대한 불명예를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후세들은 <난중일기>와 <실록>을 근거로 배설은 오랜 바다 생활에서 얻은 어지럼증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요양 신청을 내 허락을 받고 군영을 떠나 고향에서 요양 중에 있었는데 전란 후 느닷없이 모반죄로 참형을 당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배설이 참형당하고 6년 후에 조정에서는 배설 장군을 일등공신으로 책록 하면서 호조참판에 추증했는데, 이는 당대 조정이 판결의 잘못을 인정하고 명예와 신원을 회복했다는 주장이다(이상흔 2014). 아무리 영화나 소설의 상상력이 예술에 대한 창작의 자유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의 역사적 평가가 신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배설이 칠천량 해전에서 12척의 전선을 빼돌려 도주한 것은 조선 수군에는 또 다른 '신의 하수'가 될 줄이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을 것이다. 바로 배설이 도주시킨 12척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그 유명한 장계를 보낼 수 있었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이런 장계를 올리게 된 연유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 대패하여 조선 수군이 멸되고 국왕 선조는 8월 3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파직 5개월여 만이었다. 그랬던 선조는 불과 12일 만인 8월 15일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네, '지난 해전에서 패한 결과로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를 돕는 것도 가하다'라는 내용의 편지였다(이민웅 2021, 328). 이순신 장군 수군 재건의 의지를 불태우며 경상도 초계, 단성, 진주에서 전라도 구례, 곡성, 옥과, 순천, 낙안, 보성을 거쳐 장흥 회령포에 도착한 날짜가 8월 18일이었다.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언뜻 국왕이 이순신과 조선 수군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왕 선조의 이른바 어심(御心)이 얼마나 죽 끊듯 하며, 선조와 조정이 일본군의 전략에 얼마나 무지한가에 대해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왕에게 보낸 장계를 좀 더 상세히 기술한다.


"저 임진년으로부터 오륙 년 동안 적들이 감히 전라도와 충청도로 바로 쳐들어오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부 없애 버린다면 이는 곳 적들이 크게 다행으로 여기는 것으로 호남을 거쳐 한강까지 곧바로 쳐들어갈 터인데, 신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박기봉 2006 재인용).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보낸 장계 내용을 보면 장군은 일본 수군의 전략과 심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포기하는 것은 일본군이 가장 바라는 것이며, 수군이 무너지면 호남이 무너지고 '호남이 무너지면 국가도 없다(若蕪瑚南 是無國家)'라는 논리의 상소로 수군 폐지론을 물리치고 이후 명량해전에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류성룡 2021, 260).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은 이순신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시 if로 돌아가자. 당시 칠천량 전투의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만약 배설이 칠천량 전투에서 도주하지 않고 계속 싸웠다면 12척의 전선마저 잃었거나 그 자신도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당시 배설이 전선에서 무단이탈하여 도주한 것은 군법의 참형감이었고 실제 전쟁 후에 참형을 당했지만, 역사의 우연이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회령포에 숨겨놓지 않았다면 이순신 장군이 저 명량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싶다. 명령에서의 전투가 9월 16일이었으니 이순신 장군이 8월 18일 회령포에서 12척의 전선을 인계받은 지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 쓴 일기에 승리에 대한 소감을 단 한 줄,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이었다"라고 썼다(정두희 1997, 78). 장군의 소회가 얼마나 복잡하고 심란했겠는가마는 그는 그 모든 것을 '천행', 즉 '이는 실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此實天幸)'라고 말했다. 이 천행이라는 말에는 배설이 도주하면서 숨겨놓은 12척의 배를 인계받을 수 있었음에 대한 천행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 12척이야말로 천행의 시작이었고, 무적 조선 수군의 재건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류성룡. (2021). <징비록>. 홍익출판미디어그룹.

박기봉. (2006). <충무공이순신전서>, 비봉출판사.

이민운. (2021). <이순신 평전>. 책문.

이상흔. (2014). <조선일보>. <[조선 Pub] 영화 '명량'에 나오는 배설 장군, 과연 그렇게 비열한 인물이었나?>. 9월 21일.

정두희. (1997). <조선시대 인물의 재발견>.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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